[데일리연합 이소현 기자]폴란드는 이웃 강대국 독일에 1000년 가까이 시달린 민족이다. 120여년간 나라를 빼앗겼고, 2차대전 중 600만명 이상이 나치에 학살당했다. 하지만 독일의 끝없는 반성은 피해국 폴란드의 마음을 열고 있다.
지난해 9월 독일 베를린의 연방의회에서 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2차대전 발발 75주년' 기념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문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25년 전 콜 총리의 '화해의 미사'에 대한 헌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두 나라의 화해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며 "미래 세대와 유럽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맺었다.
폴란드·독일 두 나라의 현대사는 반성이 상대의 용서를 이끌어내는 과정의 반복이다. 1965년 폴란드 천주교계는 '천주교 폴란드 전래 10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며 서독 종교인에게 초대 서한을 보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우리가 용서할 테니 우리를 용서해 달라!' 독일 나치의 만행을 용서할 테니 폴란드가 2차대전 후 독일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피해국이 가해국에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이 서한은 서독의 여론을 움직였고 1969년 서독 총리에 취임한 빌리 브란트가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동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폴란드·독일 화해 재단의 다리우스 파울로츠 이사장은 "용서가 가장 좋은 복수라는 독일 속담이 있다"며 "먼저 반성하고 용서하는 것이 최선임을 독일·폴란드 사례는 보여준다"고 전했다.
유럽에선 지금 '반성과 용서'를 주제로 한 역사 이벤트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8일 폴란드 북부 발트해 연안 도시 그단스크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도널드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체코·불가리아 정상 등이 모여 '종전 7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독일에선 호르스트 쾰러 전 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참석한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오는 10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찾아 무명용사 묘에 헌화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독일과 러시아 양국 관계가 최악 상황이지만, 나치에 대한 반성은 거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 2차대전 때 군인·민간인을 합쳐 6000만명 이상 사망했다. 같은 시기 동북아도 태평양전쟁 소용돌이에 휘말려 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현재 두 지역 상황은 확연히 대비된다. 유럽은 가해국과 피해국이 함께 손잡고 역사를 기억하고, 유럽연합(EU)이라는 공동체를 구축하고 있다.
반면 한·중·일 3개국은 여전히 역사의 굴레에 짓눌려 반목 중이다. 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유럽의 현대사를 반추해 보면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 프랑스의 '로베르 슈망재단' 파스칼 조아넹 사무국장은 "가해국의 진솔한 반성과 피해국의 용서를 통해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유럽에는 있다"며 "정치 지도자들이 유럽 공동체 건설이라는 비전을 갖고 이를 꾸준히 추진해 온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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