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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 6.25 전쟁과 같은 전쟁은 다시는 한반도에서 일어나서는 알 될 것. ‘새에덴교회(소강석목사)는 매년 6.25 참전용사 행사 가져’

소강석 목사,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국회 사진전 찾아 “절대 잊어선 안 돼”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국회 사진전이 6월 13일~16일 국회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개최됐다. 이날 소강석 목사는 이번 사진을 관람하면서 6.25 전쟁 중에도 주일예배를 드리는 사진을 보며 감탄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않 될 6.25 전쟁’ -소강석 목사 말씀 중에서,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매년, 6월이 되면, 6.25 전쟁에 참여한 6.25 참전용사와, 에디오피아를 비롯한 미국 등 외국 군인과 가족들을 초청해 새에덴교회에서 행사를, 가졌다. 그러면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않 될 6.25 전쟁을 상기시켰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정경희(국민의힘)의원이 주최한 이번 사진전에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이번 사진전에 참관해, 이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은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눈에 띄는 등 정경희 의원과 함께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받았다. 정 의원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 국회 사진전 찾아 “절대 잊어선 안돼”란 주제로 사진전을 열었는데, 이번 사진전을 통해, 6.25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분명히 알려 주려했다“며 사진전을 소개했다.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저희교회는 16년동안 한국전 해외 참전용사와 국내 참전용사를 초청해 왔다. 그래서 비교적 6.25와 관련된 사진들과 동영상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없는 자료도 꽤 있는 것을 봤다. 그 중 하나가 전쟁중에도 주일 날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었다”며, 전시회를 개최한 정경희 의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또한 “부모님과 아이들이 같이 와서 사진을 보는 것을 보고 참 감동을 받았다. 부모님께 찾아가 정말 훌륭하고 대단하시다고 인사를 드렸다 ”며 우리나라의 바른 역사교육에 대한 열망도 드러냈다.

소강석 목사는 “우리는 절대로 6.25 의 참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잊지 않아야 안보를 더 강화하고 평화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잊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누린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잃어버릴 수 있다”며 “특별히 기독교는 기억하는 종교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잊어버리면 우리 신앙이 금세 타락하듯이 말이다. 우리 국민도 6·25의 참혹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편 소강석 목사는 올해로 16년째 한국전쟁 참전용사 보은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9일 새에덴교회에서 용인시와 오산시 국군 참전유공자와 에디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 후손을 초청해 섬기고, 7월 26일에는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 한국전 참전용사와 가족 400 여명을 초청해 보은행사를 연다. 이어 27일에는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준공식 ’에 후원교회로서 참여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할 예정이다.

 

이번 사진전을 개최한 정경희 의원은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해박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의 좌편향성을 고발하는데 앞장서 왔으며, 국회의원으로서 전교조 출신 교육감들의 편향된 교육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6.25 한국전쟁

‘6.25 한국전쟁은 우리나라가 힘없는 약소국가 속에서 외세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결에 휘말림이 결국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북한 김일성의 남침을 통한 원치도 않는 민족 상존의 아픔을 당해야만 했다. 우리는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며, 6.25를 경험한 세대가 모두 떠나기 전, 6.25에 대한 바른 교육이 바로 되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전 백마부대 부 사단장을 역임하신 조주태 예비역 장군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때 조 장군의 말씀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6.25 에 대한 회고를 들어 본다. 조주태 전 장군은 1924년생으로 전 예비역 장군으로 베트남 전투에 참여 백마부대 부 사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1950년 6.25가 일어나던 전까지는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했다. 6.25가 일어나면서 그는 전쟁터로 출동했다.

조주태 장군,“제가 소속인 1사단 15연대가 수풍발전소를 방어하게 되었는데 제가 이끄는 소대가 1950년 10월25일 아침에 장총을 가지고 가는 2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중공군이었습니다. 즉시 후송시켜서 UN군이 조사해서 확인한 결과 한국전에 중공군이 개입 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중공군 포로를 제일 먼저 잡은 부대가 15연대. 연대 중에서 직접 잡은 소대가 저희소대. 그때에 제가 소대장. 이 말은 제가 잡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은 일로 인해 훗날 화랑무궁 훈장을 받았습니다”

- ‘조주태 장군과 인터뷰 중에서’

 

조주태 장군님! 6.25 전쟁의 원인은 무어라 생각되는지요?

“예. 6.25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통보 없이 남침한 전쟁이죠. 6.25전쟁은 남한과 북한이 사회이념을 가지고 싸운 전쟁입니다. 북한은 소련의 사회공산주의를 선택하였고 남한은 미국의 민주자본주의를 선택하였기에 일어난 전쟁으로 6.25는 우리의 전쟁이지만 사실상 미소냉전에 의한 세계의 새로운 구도에 끼어들어 어떻게 보면 미소의 대리전쟁을 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없다보니 생긴 전쟁이죠. 2차 대전으로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국은 공산주의가 퍼지지 않게 하려고 우리나라의 남한을 원조했고, 소련은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 북한을 지원한 결과로 북한 김일성의 남침야욕과 합쳐 일어난 전쟁입니다. 사실 북한이 남침을 하게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극히 여기에 대한 준비가 소홀했고, 방심했습니다. 준비하지 못한 것이 전쟁을 만들어 내었죠. 대비책을 세워야 하는데 힘이 없어서 당한 겁니다. 제가 전쟁이 시작될 때에 중위로 소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는 53년에는 대대장을 지냈습니다. 사실 전쟁은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이 싸우는 것입니다. 저는 전쟁터에서 시작. 전쟁터에서 마쳤습니다. 저는 한국의 3개의 큰 전쟁을 다 치렀습니다.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입니다. 제가 백섭엽 장군을 모시고 6.25전쟁을 치렀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백마부대 부 사단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사실 지금 전쟁에 참여한 장군 중에 생존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백선엽 장군. 이세호 장군과 제가 가장 많은 전투를 치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조주태 장군님! 직접 경험한 전투 중에 기억나는 치열한 전투는?

제가 경험한 전투하면, 미아리전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50년 6월 27일. 28일 첫 새벽에 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북한 탱크 3대가 우리 부대를 덮친 것 입니다. 또 한강 방어 전투입니다. 북한군은 내려오고 결국 한강 다리를 폭파하게 되는 데 일방적인 폭파로 피난민도 내려오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실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가 아니면 폭파할 수 없는데... 그 당시 최창식 공병대령이 총책임을 지고 부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거를 받았습니다. 5.16 이후 유가족들이 탄원서를 내면서 재심해서 진위가 밝혀져서 최 대령의 유해가 국립묘지에 안치 되었습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전투는 다부동 전투입니다. 경북 칠곡군 다부리에 1사단 사령부가 있어서 다부동 전투라 합니다. 45일 전투를 시작했는데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릅니다. 그때 폭탄 소리 등에 의해 지금 귀도 잘 듣지 목하고 있습니다마는... 당시 제가 모시고 있던 1 사단장이 백선엽 장군이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1사단 15연대 대전차포 소대장이었는데 제가 생각해도 항상 앞장서는 최고 고생 많이 한 소대장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인민군 주력군(9만 8천명)이 전멸 되었고,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고, 9월 16일에는 전 군이 북진을 시작하였고 9월28일에는 수도 서울 탄환을 하였습니다. 10월1일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하였고, 10월 19일 새벽에 평양에 들어갔고, 결국 평양탈환작전으로 대세는 바뀌게 되었죠. 이윽고 평양북도 운산 전투를 하게 되는데 운산에서 중공군과 부딪칩니다. 우리 1사단이 수풍발전소를 막고 있는데 15연대가 방어하게 되었는데 제가 이끄는 소대가 우연찮게 두 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은 다름 아닌 중공군이었습니다. 1950년 10월25일 아침에 장총을 가지고 가는 2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중공군이었습니다. 즉시 후송시켜서 UN군이 조사해서 확인한 것은 중공군이 개입 된 것입니다. 중공군 포로를 제일 먼저 잡은 부대가 15연대. 15연대 중에서 직접 잡은 소대가 저희소대. 그때 제가 소대장. 이 말은 제가 잡은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은 일로 인해 훗날 화랑무궁 훈장을 받았습니다.

 

6.25전쟁의 전개과정

아시는 대로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하였고, 그해 8월1일 미 제 8군사령관,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명령. 8월5일 인민군의 8월 공세 시작. 8월16일 B-29 폭격기, 융단폭격. 8월31일 ~ 9월8일 인민군의 9월 공세.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9월28일 수도 서울 탄환. 10월1일 국군, 38도선 돌파 북진. 10월25일 중공군, 제1차 공세 개시. 10월26일 국군, 압록강 초산 도달. 11월21일 미 제10군단, 두만강 혜산진 진입. 그 다음해 인 1951년 3월15일 국군, 서울 재탈환 및 북진. 1951년 4월12일 맥아더원수 해임, 리지웨이 장군 유엔군사령관 임명. 1951년 6월23일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 휴전회담 제의.

 

1950.6.25 북한군의 남침. 새벽 4시경, 북한인민군은 7개 보병사단,1개 기갑여단 및 특수 전 부대를 포함, 총 1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38도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을 시작하였다. 1950.6.26 유엔안보리, 북한군 침공중지 결의 한국의 사태를 보고 받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불법 남침 중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결의안을 찬성 9, 반대 0, 기권 1로써 가결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이 집단안전보장조치로써 침략을 저지하고 평화의 회복을 달성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북한군의 계속되는 공세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선정하고 이 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한다는 작전을 계획하였으며, 미 제 8군 사령관 워키 중장은 8월 1일 전군에 낙동강방어선으로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북한인민군은 8월 5일부터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에 맞서 국군 및 유엔군은 왜관·다부동, 창녕,·영산, 마산, 포항, 안강 등에서 방어전을 전개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편에 집결해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유엔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출격한 B-29폭격기 98대가 왜관서북쪽 낙동강변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것은 6.25전쟁에서 전무후무한 대량의 융단폭격이었다. 8월 공세에서 성과를 얻지 못한 북한군은 다시 9월 공세를 시작하여 왜관·다부동, 창녕· 영산, 마산, 포항 등을 공격하였다. 한때 영천과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으나 국군 및 유엔군은 사투를 벌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이곳에서 반격할 기반을 조성하였다.

맥아더 유엔사령관은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261척의 함선과약1천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으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전세는 반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과 추격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인천에서 상륙한 미 제 10군단 주력과 낙동강전선에서반격을 실시한 미 제8군 주력이 적을 추격하여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하였으며, 9월 29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에서 거행되었다. 반격을 실시한 국군 및 유엔군은 9월 30일 드디어 38도선에 도달하여 대망의 북진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엔군사령부로부터는 정식 북진명령이 하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명령에 의해 국군 제3사단 제 23연대와 수도사단의선두부대가 동부전선에서 38도선을 돌파함으로써 북진작전의 막이 올랐다.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여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야간행군으로 북한지역의 산악지대에 잠입한 중공군의 대군이 처음으로 공세를 개시, 국경선에 접근한 국군 및 UN군 부대들을 포위·격파하였다. 한만국경선으로의 공격명령을 받은 국군 중에서 제6사단 제7연대의 선봉부대가 26일 최초로 압록강변에 도달하였다. 9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지 41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도 곧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급히 철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공군의 공세를 받아 미 제8군이 청천강선으로 철수한 서부전선과 달리 동부 전선에서는 미 제10군단이 계속 북진을 실시하여 미 제7사단의 선두부대가 국경도시 혜산진을 무혈점령하였고, 국군 제3사단은 합수, 백암까지, 수도 사단은 청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들 부대들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철수하게 되었다. 거침없이 공격하던 중공군은 남으로 진출할수록 병참선이 길어지고 그 병참선이 유엔 공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한편, 워커 장군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제8군사령관은 위력수색 작전으로 적의 위치와 전투력을 확인토록 하면서 반격을 실시하여 전선을 북으로 밀어올리고, 3월 중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38도선까지 진격한 후 이 선을 돌파하여 재차 북진하였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그 자신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하지 않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 미극동군사령관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6.25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북진하여 한만 국경선 가까이 도달함으로써 남북통일의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한반도를 통일한다는 목적을 포기하고 정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소련과 중공도 이런 사태를 인식하였으며, 마침내 유엔 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정전의사를 표시하므로 서 전쟁을 중지하기 위한 양측의 합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에 어떻게 당했나? &전쟁 결과. 영향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우리 남한이 국력이 너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국방력이 더 약했는데 매일 큰소리를 쳤거든요. 사실 힘 있는 사람은 큰 소리를 안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큰 소리를 치니 우리 상황을 저들이 더 잘 알아차린 거지요. 큰소리치다가 비상도 해제하고, 일요일에 군 부대원들을 거의 농어촌 돕기 운동 등, 다 내 보내고 남아 있던 병력마저 외출을 다 보냈으니 기습을 당할 수밖에요. 준비 없이 허풍만 떠는 것은 금물입니다. 우리가 6.25 전쟁 62돌을 보내면서 정신 차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잠을 깨워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좌. 우로 갈라져서 공산주의 사상이 짝 깔려 있었거든요. 만약 6.25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내부적으로 붕괴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6.25가 큰 이민족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큰 촉매였습니다. 앞으로 젊은 세대가 6.25를 바라보면서 6.25격은 세대와 6.25때 싸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6.25 전쟁 바로 알리기 운동을 전개해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북한이 먼저 기습한 전쟁임을 확실히 알려야 합니다. 북한의 거짓말을 더 이상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서 생긴 전쟁이라는 것. 정신 차리라는 청신호. 결과적으로 거짓말하는 북한은 망하고, 정신 차리고 힘을 기르면서 준비하는 동안에 대한민국은 완전히 이긴 것입니다. 우리경제는 이제 세계10위. 북한은 꼴찌입니다. 6.25를 통해 우리나라가 잠을 깬 것입니다........

전쟁 결과는 이렇습니다.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합니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 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전쟁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 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 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6.25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8.15 해방이후 외세인 미소에 의한 조국의 분단이 전쟁의 영향으로 인해 2세대가 넘는 현재까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혈육의 정이 남아있는 이산가족 세대들도 자연의 이치에 의해 이제 사망하여 줄어들고 있기에 민족의 끈끈함이 더 사라지기 전에 민족의 분단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숙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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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빈증성 우정의 만남… 경제 교류 동반성장 한뜻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정호영기자 기자 | 이장우 대전시장은 출장 5일 차인 25일 베트남 빈증성과 경제교류협력을 위해 빈증성 행정청사를 방문했다. 대전시 대표단은 빈증성 당서기를 만나 대전기업들의 빈증성 진출을 위한 경제협력을 요청했고, 이어서 경제사절단과 함께 빈증성 인민위원장과 간담회를 개최했다. 이 시장은 빈증성 인민위원장과 관계 공무원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전의 유망한 기업들을 소개하고 기업들의 현지 진출을 위한 요청 사항 및 애로사항 등을 건의했다. 이 시장과 동행한 경제사절단은 베트남 행정청과 사전에 긴밀히 상의하여 빈증성에서 관심이 많은 제조업, 정보통신(ICT), 바이오 등 분야의 16개 기업을 선발해 구성했다. 빈증성 행정청 관계자들은 방문한 기업들의 현황, 보유 기술 등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며 유의미한 면담이 진행됐다. 이장우 시장은 “이번 면담이 대전기업들의 베트남 판로 개척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라며 “앞으로도 지역기업의 해외 진출에 적극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대전시는 빈증성과는 2005년부터 자매도시를 체결하여 19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