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05.08 (수)

  • 맑음동두천 11.4℃
  • 구름많음강릉 11.6℃
  • 맑음서울 12.2℃
  • 맑음인천 12.3℃
  • 맑음수원 12.7℃
  • 맑음청주 12.1℃
  • 맑음대전 12.6℃
  • 구름많음대구 13.4℃
  • 구름조금전주 13.3℃
  • 구름많음울산 12.0℃
  • 흐림광주 12.1℃
  • 흐림부산 12.6℃
  • 흐림여수 12.0℃
  • 제주 14.1℃
  • 맑음천안 12.3℃
  • 구름많음경주시 12.6℃
  • 흐림거제 13.0℃
기상청 제공

기본분류

조르주 루오 전, 연말연시 맞아, 발길이 이어졌고,‘2022 JMA WINTER FESTA’전시와 함께 한‘조영남 명사스캔들’ ‘감동’였다.

전남도립미술관,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전에서 “깊이 패인 주름 속에 고통을 겪는 자들의 말없는 친구”이고자 했던, 20세기 예술 거장 조르주 루오의 예술과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지난 31일(오후 3시) 전남도립 미술관에서 가수겸 화가로 활동 중인 조영남 작가를 초청하여 ‘명작 스캔들’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초청 강사인 조영남 작가는 ‘조루주 루오 미술’에 대한 강연과 음악이 어우러진 토크쇼를 진행했다.
 

 

 

조 작가는 미술가로 살아온 그의 경험을 통한 인문학 강의와 음악, 미술까지 통합된 토크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이날 그는 세씨봉 노래를 시작으로 ‘조르주 루오’의 그림 세계를 설명했다. 그는 조르주 루오 작가를 소개하며 "사랑해야할 사람을 증오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중오'의 문제 해결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사랑과 증오의 공생을 예수로 풀어내며, 평생을 예술에 자리에 있던 루오는 평소 흰 제의를 입고 작품을 그렸다."고 전했다. 

 

이어서 조 작가는 예술이 가진 힘, 그림, 노래, 문학, 시가 가진 힘에 대해 설명하며, 가수와 화가의 특이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음악은 규칙이 있고, 미술은 자유로움으로 정의했다. 

 

또한, 지난 일들을 회상하며 나를 자책하기도 하고, 좋았던 기억을 칭찬하며 따뜻한 마음도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대한다는 마음을 전했다. 
 

 

 

조르주 루오는, 중세 프랑스의 작가이다. 조르주 루오는 프랑스의 거장들로부터 영감을, 중세 르네상스 이후 분열된 종교적 전통과 세속적 전통을 통합한 인물로 유명하기도 하다.

조르주 루오는 중세 스테인드 글라스 유리창을 복원한 작품을 하게 되면서 영향을 받았다. 1891년 프랑스 국립 미술 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했고,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1898년경부터 자연주의 학풍.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및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1905년 가을에 전람회가 열렸을 때에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는 화가들과 협력자로 일하게 된다. 조르주 루오는 1930년대에 예수의 고난을 다룬 훌륭한 연작을 그렸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초록색과 노란색 같은 색을 추가해 가면서 자연파를 뛰어넘어 초자연적인 분위기의 풍경화를 그려냈다.

 

조르주 루오는, 중세 프랑스의 거장들로 부터 받은, 자연주의, 감성주의, 행동주의, 지식주의 등으로부터, 영감의 그림을 그려 초자연적인 표현들을 했는데,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분열된 종교적 전통과 세속적 전통을 통합하게 만드는, 통전적인 풍을 그려내 놓은 것이다. 

 

 

조르주 루오는, 1885년 파리 ‘장식미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885~90년 유리 제조공의 작업장에서 견습을 했다.


조르주 루오의 초기 화풍은 아카데미 양식에 입각한 것이다. 루오는 1898년경 심리적 갈등을 겪고 난 후, 부분적으로는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및 폴 세잔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게된다.

 

그는 세계 1차 대전 이전까지, 수채화와 유채화를 동시에 그림 그렸고, 주로 파란색을 썼고, 확실한 조명과 강렬한 필치가 특징적이다.

 

 

 

조르주 루오의 미술은 그 당시 카톨릭과 함께 발전했다.
조르주 루오는 1895년경에 열렬한 로마 가톨릭 교도가 되었는데, 법원 법정에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잃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된다. 이때 조르주 루오가 즐겨 다루는 주제는 매춘부와 비극적인 모습의 광대 및 무자비한 판사로 바뀌었다.

 

 

이때 루오는 수채화 보다는 유화를 더 많이 사용해 그림을 굵게 확연히 그렸다. 루오는 물감을 풍족하게, 감각적으로 사용하며, 위풍당당한 표현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루오는 종교적인 주제로 구원의 가능성을 확실히 더 강조했다. 1930년대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훌륭한 연작을 그렸다. 그 당시 조르주 루오의 대표적인 작품은〈조롱당한 그리스도〉, 〈성스러운 얼굴〉, 〈그리스도와 대제사장〉 등이다.

 

 

조르주 루오는 자신의 초기 작품에 다시 작업하게 되었는데〈늙은 왕〉의 경우 그 제작 연대는 1916~36년이다. 세계 1차대전과 세계 제 2차 대전 사이에 조르주 루오는 파리의 미술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권유로 볼라르가 쓴 〈페르 위뷔의 환생〉과 루오 자신이 쓴〈별똥별 소동〉, 샤를 보들레르가 쓴〈악의 꽃〉및 루오가 그림 설명을 단 찬송가〈미제레레 Miserere〉에 삽화로 넣을 판화의 제작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조르주 루오의 작품은 그 동안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가 후에 완성해 출판되었다. 1929년에 조르주 루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발레〈방탕한 아들〉을 위해 무대 배경과 의상을 디자인을 하게 된다.

 

조르주 루오는 이후, 1937년에 태피스트리 연작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대부분은 자화상이었다. 그리고 정물화도 영감이 떠 오를 때마다 하나씩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조르주 루오는 초자연적인 분위기의 그림 몇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 〈밤의 성무일과〉는 그 좋은 예이다.

 

조르주 루오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프랑스에서 거의 지지받은 적이 없는 표현주의를 실천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루오가 근세에 가장 설득력 있는 종교화가였다는 점이다. 루오는 19세기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속에서 뒤늦게 꽃을 피웠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SNS TV

더보기

가장 많이 본 뉴스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