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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 박사) 한국교회 이야기

한국교회 이야기


한국교회의 자랑은 충실한 교회 발전과 세계선교 그리고 한국교회사 연구를 통한 세계수준에 이른 민족사적 신학적, 성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국민훈장목련장. 용재학술상을 수상 받은바 있는 민경배 박사를 통하여 기록되고 가르치고 있는 현장은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는 한국교회를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찌기 연희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애버딘대학교, 런던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日本 京都 同志社大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국교회의 자랑이며, 보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민족역사 사가로써 그 동안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원장, 서울장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현제는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로 역임 중에 있다. 필자는 민족역사가 이시며, 교계의 원로이신 민경배 박사를 만났다.

 

민경배 박사님께서 교회 역사사가로써 보시는 한국교회 역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


“한국교회는 일제의 한국침략과 통치의 기간에 그 골격이 굳혀졌죠. 그런데 거기에 참 묘한 섭리와 경륜이 있었다라며, 민 박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어서 설명한다. 사실 근대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확장을 밀고 나갈 때 대개는 서양기독교와 함께 진출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 제국주의가 일본이었죠. 따라서 기독교는 오히려 항일 민족독립의 운동과 동맹하게 되었고 민족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이것은 실로 세계유일의 경우이며, 고난 속에서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특히 서양 미국선교사들은 한국에 들어올 때에 경건주의나 복음주의의 교파적 기독교신앙, 곧 정교분리의 이원적인 구조를 가진 기독교를 우리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현실에 좌우되지 않는 보수적 신앙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겨레와의 밀접한 관계를 중요한 선교의 주축으로 하는 선교사들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이나 그들의 가혹한 경제적 침탈은 그들의 신앙 원형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겨레와 함께 일제에 항거하였고, 함께 수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을 자랑하게 하고, 국학연구의 기초를 닦아놓았으며, 더 나아가 우리 생활 향상을 위한 교육, 산업, 문화사역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교회사는 민족사였습니다.

 


특히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하여서는 기독교는 한국의 자립적인 근대시민 층 곧 한국의 중산층 형성하였으며, 산업발전과 자본주의 발전에 무시할 수 없는 크나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제 말기 그 최후의 순간까지 민족자본으로 남아 있었던 기업은 평양의 메리야스와 고무공업 그리고 송도의 송도 직물이었는데, 이들은 다 기독교 기업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교회만을 위한교회가 아닌 민족기독교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20세기 초 기독교가 오랫동안 반일의 선봉으로 나설 때 천도교 쪽에서 기독교와의 합동을 제의해 온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한치진은 한국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국종교를 편성할 수 있다는 말까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상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에 앞서, 그만큼 기독교가 한국에서 민족의 종교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한국기독교의 다른 한 세계사적 공헌은 한국교회가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을 통하여 세계기독교의 구도를 완성하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한국에 모여들었던 세계 유수의 거대신문 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위상을 교회 안에서 처음 확실하게 정립하였기 때문이죠. 그 당시 신학 중에서 가장 경원되고 소외되었던 분야가 이 성령론이었습니다. 성령의 직접 감동을 말하는 이들이 대개 기성교회와 그 전통을 부정하는 자세를 취하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성령운동이 일어나자 곧 교회를 조직하는, 그런 형태로 성령운동이 전개되고, 그것이 다시 세계선교에 착수되는, 아주 확고한 구도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죠. 성령신학의 착수는 실제 한국에서 비롯되었다고 함이 옳습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이해 없이 기독교의 전방위적인 이해는 어렵다는 말이 그래서 전해지게 된 거죠.

일제 치하에서 우리 교회는 민족의 횃불로 희망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1906년 윤치호의 작사 “동해물과 백두산”은 삼천리강산이 온통 무궁화로 덮인 것을 보게 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을 찬양하면서, 우리 강토 전부가 다 비단실로 수놓아진 아름다운 땅으로 노해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힘이 일제의 포악을 이기게 한 근거가 된 거죠.

 


우리 한국교회는 19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성육신 기독론의 교회로 굳혀가고 있었다. 성육신론은 본래 이질적인 것의 연계와 통합인데, 성도지간이나 교회와 민족의 결속 연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늘과 땅, 교회와 세계, 주일날과 다른 요일들의 관계, 이런 것들을 다 하나님의 세계의 폭으로 보는 거대 세계관을 가지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도 그 내부의 시련으로 험한 길을 걸었습니다. 교세의 지역적 편중으로 서북과 비 서북의 교회 갈등구도가 편성되었고, 서북은 대개 보수주의, 비 서북은 근대주의, 이렇게 대강 크게 분류할 수 있는데, 이런 구도는 한국교회가 거치는 여러 문제에 언제나 그 형식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선교사에 대한 반발이나 민족교회 형성, 사회선교나 기독교학교문제, 신사참배 문제, 어디에서든 반드시 두 진영은 대립하였죠. 그리고 그런 역학구도는 이직도 우리 교회 안에 보수주의와 개혁주의 유형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 정량론의 형태를 봅니다. 사실 역사에는 반드시 이원적인 구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도나 대립은 역사 안에서는 결코 살아지지 않죠.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그 긴장으로 우리교회를 살아있게 하는 활력소가 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으면 거기에는 반드시 독선과 정죄가 따른다고 봅니다. 그때 거기에서 생기는 위선과 오만은 피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른 형태는 전체주의입니다. 역사정량론과 반대되는 것이죠. 우리는 나와 반대되는 실체를 정죄로서가 아니라 분담 매카니즘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일상성과 그 관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비판받을만한 것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분담 메카니즘으로 보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겁니다. 신앙은 체험이거든요. 교회의 역사는 체험되어진 것이고, 이러한 체험신앙에서 교회는 출발한 것이죠. 사실 신앙에서 체험은 중요 합니다. 체험될 때 더 확실히 이해되니깐,

하지만 신앙생활에 체험은 누구에게나 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리고 체험적인 신앙은 또 다른 체험을 바라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광야에서 수 없는 기적을 보고도 또 기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앙에는 그런 체험적인 것이 없더라도, 신앙을 지켜나갈 장치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객관적인 교회제도요 관례요 전통이라 봅니다. 이런 것이 우리 신앙생활을 보장해 줍니다. 계속 새로운 것만을 찾거나 새로운 것이라야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생명의 보증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겪은 커다란 시련가운데 가장 큰 것은 역시 교회 분열입니다. 그 분열은 미증유의 민족 상쟁인 6.25사변 그 한복판에서 진행되었다는 데 우리의 아픔이 큼을 느낍니다. 민족의 상쟁 속에서 사랑과 화해와 일치의 복음을 외쳐야할 교회가 스스로 저쪽을 공산주의자 같다고 해서, 그 군사적 혈전 현장에서 분쟁합니다. “치욕의 기록이다. 하필 왜 전쟁 중 분열을 했을까” 그런데 그 분쟁은 신사참배 문제가 그 핵심이슈였습니다. 일제말기 한국교회는 충성의 분열이 있었습니다. 신사참배 강요는 포악의 극치였습니다.

이런 때에 대개 다섯 형태의 대처 자세가 있었습니다. 순교하는 것, 시골에 낙향하여 무명으로 지내는 것, 해외 망명, 굴욕의 현실교회를 그래도 붙들고 지탱하는 것, 그리고 나서서 친일하기, 대개 이런 유형일 것입니다.

이 중에서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형태의 자세는 어떤 것이었을까. 순교는 최고의 순수한 신앙의 증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성장이 멈추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교회 성장이 멈추었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런 것이 한국교회의 약세화나 몰락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런 것이야 말로 물량적 교회성장 발상입니다.

해방 당시 한국교회 교세는 46만 명이었습니다. 그런 힘으로 끝까지 한국교회를 지켜왔습니다. 1919년 3.운동 당시에는 교세가 고작 28만이었습니다. 그 교세로 한국교회가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전체 희생자의 70%에 이르는 피해를 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지적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 교회가 교회 확장을 위한 인위적 의도적 사업들을 펼치는 데 있다고 보입니다. 뭔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는 것 같습니다. 본질적인 것 보다는 외형적인 데에 너무 집중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민 박사는 말한다. “교회는 경건하고 조용하고 거룩한, 기도와 감사, 그리고 정숙의 자리였으면 합니다. ”. 왜냐하면, 인간은 본래 종교적 분위기를 갈망하거든요. 이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영적이고 내적인 힘, 거기에 인도되고 싶어 합니다. 거기에 참 엄청난 힘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세상에는 다 각각 다른 것으로 봉사하게 되어 있다.

민 박사는 말하다. “교회가 안 해도 될 것은 교회가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면 못하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을 줄 때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 한국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지금 우리는 세계적 교회로서 세계에 우뚝 서 있습니다. 세계선교의 사명은 우리 한국교회에 맡겨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름이 Chosen 곧 선택받은 민족이란 뜻이 아니던가. 최근 영국의 전통적인 대형교회가 한국교회에서 접수해주기 바란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역할은 이제 세계가 다 주목하고 있는 실체가 되었습니다.

일찍이 1907년에 한 세계 거대신문 특파원은 한국이 중국을 기독교화 시킬 유일한 기계라고 단언한 일이 있습니다. 중국의 향후 세계에서의 위치는 엄청납니다. 초강대국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이때에 우리는 세계선교의 전략을 중국을 중계로 한다는 형태로 추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위한 바램사항이 있다면 교계 원로로써 한 말씀 바랍니다.

 

한국기독교는 민족의 중추적 힘으로 지금껏 살아왔고, 근대 한국을 건설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근대 시민사회를 편성하고, 산업사회를 건설하며, 교육을 전국적으로 펼친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우리민족의 시련기 곧 을미사변, 한일합병, 3.1운동, 일제말기의 단말마적 시련, 6.25사변, 이런 비극을 거치면서 한국 그 주체성을 지키고, 끌어올리고, 세계 유수의 나라로 만든 저력, 그것은 우리 기독교가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후 건국과 교육의 이념을 홍익인간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기독교였습니다.

우리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런 역사적 전통을 확인하고 다짐하고, 거기 대한 긍지를 드높이며,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라 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이 빛나는 민족사적 세계사적 공헌을 실체 그대로 선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글_ 이성용 발행인

 

 

※ 민경배 약력

학력: 연희대학교, 영국 애버딘대학교, 런던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日本 京都 同志社大學. 신학박사.

경력: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현재: 백석대학교 석좌교수.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국민훈장 목련장, 용재학술상

저서: 『한국기독교회사』, 『한국교회찬송가사』,

A History of Christian Churches in Korea. 등

 

 

[사진설명]

그림3 (main L)

그림6 (m)

그림5 (m)

그림2 (m)

민경배 교수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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