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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우리의 문화를 지키는 것은 보람있는 일’





아들 최성원과 KBS 노래가 좋아프로에 출연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24


현재 한국에서 가수, MC로 활동하고 있는 나지만 사실 한국에서 가수로 첫발을 뗀 것은 1999년 인천방송 노래자랑에 참가하면서부터라 기억된다. 당시 나는 담결석 수술로 일도 못하고 휴식중이였는데 한 친구가 와 바람이나 쏘일겸 경기도 미사리에 놀러가자하여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마침 이날 까페촌에서 인천방송이 주최하는 노래자랑이 있어 별로 준비없이 야래향(夜來香)’이라는 중국 가요를 불렀는데 즉석예심에 통과된 것이다. 더욱 분에 넘치는 것은 이날 뜻밖에도 대상에 입선하여 한국에 와 난생 처음 수상이란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다. 심사위원들은 나의 목소리가 하도 맑고 청아하여 꽤꼴새 목소리를 닮았다고들 평가하였다. 그리고 생각밖으로 전도 유망한 가수를 얻게 되었다며 기뻐들 하였다.

이날 운수가 좋게도 나는 심사위원들의 소개로 바로 라이브까페에 취직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나의 가수생애는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원래 중국에 있을 때 전문 가수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문공단에 있었던 경력이 있었고 게다가 나 또한 노래에 흥취가 있었으니 이 기회에 한번 열심히 노력해 볼 생각이 불붙듯 하였다. 두어달 지나 봄이 오자 나는 본격 노래 연습에 나섰다. 연습실이든 집이든 짬만 있으면 발성연습을 하고 지어 야외에 나가 목을 틔울 때도 있었다. 그러던중 주위 지인들의 요청으로 서울 동대문에 있는 녹음실에 가 노래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중국에 있을때부터 자주 무대에 올라가 부르던 휘파람반갑습니다를 선보였다. 생각밖으로 반응이 좋아 며칠간 계속 다니면서 녹음을 했는데 무려 22편의 가요가 테이프에 올랐다. 그중에는 묘향산의 두봉화, 배노래, 금강산 타령, 도라지, 노들강변, 밀양아리랑, 강원도 아리랑등 민요와 한국가요들이 있어 인기가 좋았다. 나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가 수없이 팔려 나갔고, 나는 짧디짧은 몇 달사이에 인기가수가 되어 한국가수협회에 등록되기까지 하였다. 2001년 나는 장춘체육관에서 있은 대형 행사인 한중문화교류의 밤에 출연하면서 더욱 명성이 있게 되었다. 이날 역시 행운스럽게도 가요 북경아가씨작곡가이며 가수인 정원수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전국 각지를 다니며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당시 정원수 선생이 나보고 함께 지방공연을 다니자고 청을 들자 나는 쾌이 승낙했던 것이다.

한국의 유명가수들과 어울리면서도 나는 항상 재한 조선족사회의 문화행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나는 한국말과 중국말을 모두 구사할 수 있다는 우세를 충분히 발휘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회 중국동포전국노래자랑으로부터 최근년간의 중국동포민속축제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행사의 사회를 맡았으며 MBC 동포노래자랑, 자선음악회 초대가수로도 활약하여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대림동, 금천구 장애인을 위한 봉사공연에도 참가하여 서울시, 구로구청으로부터 봉사상을 수여받았다.

2007년부터 나는 본격 재한 조선족사회의 결혼식, 환갑, 돌잔치 사회를 맡게 되면서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조선족은 자체의 특유한 문화를 갖고 있다. 결혼, 환갑 상차림으로부터 진행 순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노래, 춤을 비롯하여 오락문화 모두가 남다르다. 한국에 와서도 그 고유한 문화전통과 풍습은 여전해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고 어울린다. 사회를 하면서 중국동포들에게 익숙한 노래도 불러주고 때로는 함께 춤을 추며 어울릴 때 그보다 행복하고 보람있는 일이 없었다. 조선족 예술인으로서 이러한 방식 역시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 간주했다. 지난해 말에 나는 대방동에 7080라이브까페를 오푼해 조선족들의 문화오락 장소를 마련하였다. 그리로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후배 가수들을 가르쳐 함께 예술인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한국에 와 또 하나의 보람 있는 일이라면 아들 최성원 역시 예술인으로 성장해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와서는 명지대학 실험음악과를 나왔는데 역시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주최하는 한중문화교류 행사를 비롯하여 여러 행사 사회자 및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2018KBS 노래가 좋아프로에 아들과 함께 사랑의 미로를 불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사실 예술인이 되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고향이 흑룡강 계동현인 나는 중학교때는 스케이팅 선수로 500메터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58초 기록을 갱신하고 성급시합에서 5등을 따냈던 경력이 있다. 계속 노력만 한다면 유망한 스케이팅 선수로 성장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의 뜻하지않던 사연이 나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어느 한차례 시합이 끝나 만찬이 있게 되었는데 감독이 노래 한곡 부르라고 제의하기에 평시에 자주 부르던 바다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노래를 얼마나 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장내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그중 나의 노래를 청했던 감독은 눈이 휘둥그래 내가 이처럼 목소리가 좋고 노래 잘할줄을 몰랐다면서 인젠 체육말고 노래를 하라고까지 말을 건넸다. 만찬장소에서 농담식으로 던진 말이지만 나한테는 미묘한 생각을 떠오르게 한 한마디였다. 정말로 감독의 말대로 가수의 길을 택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아 괜히 마음만 두근그렸다.

그후 또 우연한 기회에 밀산중학교 음악교원의 사무실에서 발성연습을 하면서 목소리를 인정받았고, 마침내 체육을 하려던 꿈을 접고 가수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80년대 초인가 나는 둘째언니의 도움으로 무작정 연변에 와 이름있는 가수 전화자 선생님을 만났다. 전 선생은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발전성이 꽤 있어보인다면서 가르칠 의향이 있다는 뜻을 표시했다. 한편 돈이 없어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선생은 어디 갈데 없으면 불편하더라도 잠시 자기집에 있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집을 떠날대 갖고온 기름과 쌀을 들여놓고 머물기로 했다. 당시 그집에는 중환자 노인 한분이 있었는데 함께 자면서 잠자리도 펴지고 빨래도 해주면서 거들어 주었다. 배우려는 임념으로 불타있는 나로서는 이정도의 곤난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몇 달동안의 가르침을 받아 나의 노래실력이 현저한 변화를 가져왔고, 결국 전화자 선생의 도움으로 한달 급여 18위안 받기로 하고 훈춘문공단 단원으로 취직하였다. 젊은 나이에 집을 떠나 있으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가야금선을 튕기면서 떠나온 고향과 부모생각이 나 눈시울을 적신지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또 취직은 했지만 정식직원이 아니라는데서 홀대를 받아 정신적인 압력도 컸다. 그후 흑룡강성 가무단에 입단 하면서 중국에서의 나의 가수생애가 고봉기를 이룬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노력 끝에 가무단의 정식직원으로 되어 평생의 소원을 이루기도 했다.

현재 주위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인젠 한국에서 성공한 조선족 가수, MC라고 말하는데 아직도 거리가 멀다. 내가 한국에서 이만큼이라도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배움에 게을리 하지않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 생각한다. 요즈음은 각종 예약이 점점 많아져 항상 바쁘다. 한국에 70여만이나 되는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그처럼 많은 결혼, 환갑, 돌잔치 사회를 어느 한사람이 도맡아 할 수는 없다. 때문에 후배들을 잘 가르쳐 인정받는 인재로 키워야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이에 많은 정력을 쏟고 있다

대필 / 전춘봉 기자 qcf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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