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명일동에 사는 김명전 할머니(73)는 요즘 남 모를 고민 속에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있다. 사단은 지난해 11월 말 동네의 한 상가 건물에 세든 이른바 '홍보관'을 출입하면서 생겼다. 이곳에서 관내 노인들을 초청해 위문 공연을 해준다는 말을 듣고 무료하던 차에 이웃 친구와 함께 찾아간 것. 홍보관에는 다른 할머니 200여 명이 모였는데 다들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손자뻘 되는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넥타이 차림으로 도열해 맞이한 뒤 안마를 해주는가 하면 사글사글한 태도로 말벗이 돼줬다. 이윽고 유명 가수까지 나와 절로 흥이 나도록 분위기를 돋우었다. 이렇게 네 시간 동안 여흥을 즐기고 나자 지점장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할머니들에게 라면 10봉지 들이 한 묶음씩을 나눠주고는 '날마다 놀러 오라'고 했다.
이른바 '공씨 사건'으로 알려진 노인 상대 홍보관 사기 피해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요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 각지의 경찰서에는 노인 상대 홍보관 사기 피해자의 호소가 줄을 잇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가는 노인 상대 홍보관이 업계 자체 추산으로 1만여 곳에 이른다.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시골 면소재지까지 홍보관이 들어서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홍보관 영업을 하는 조 아무개씨(48)는 "전국에 걸쳐 60세 이상 노령층 가운데 최소한 20%는 하루 일과를 홍보관에서 보낸다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전국에 걸쳐 1만여 개가 난립한다는 '홍보관'은 대체 어떤 곳일까. 홍보관은 방문판매나 다단계 판매처럼 거래 형태를 기준으로 분류한 일종의 유통 업종이다. 일본에서 들어온 홍보관 유통 방식은 백화점이나 마트처럼 한 장소에 사업장을 개설해 폐업할 때까지 영업하는 것이 아니라 매장을 얻은 뒤 3~6개월 정도 노년층을 끌어들여 영업을 하다가 충분히 매출을 올리면 다른 영업 장소를 물색해 떠나는 '메뚜기형 마케팅'이다. 노인을 상대로 하는 만큼 주요 판매 품목은 건강보조식품, 건강패드(자석요·이불 등), 장례 토털 용품, 주방용품 등으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 옷가지는 콘셉트 품목이라 해서 끼워 판다. 홍보관은 지역과 취급 물품에 따라 '체험방' '떴다방' '지하방' 따위로도 불린다.
처음에는 공짜 미끼 상품을 받으러 나왔지만 이후 발길을 끊으면 '왠지 나만 소외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홍보관의 노인 상대 프로그램이 일종의 '중독' 과정인 셈이다. 기자가 만난 한 홍보관 운영 업자도 노인들의 중독을 이용해 물건을 판매한다는 점을 시인했다. "도박과 알코올처럼 솔직히 홍보관도 중독성이 있다. 여흥 시간이 끝나 집에 돌아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나가서도 끼리끼리 어울려 다닌다. 가난한 노인에게는 물건 사러 나오지 말라고 해도 지지 않으려는 듯 전세방을 빼서라도 돈을 가져온다."
바로 이런 상황을 이용해 노인 상대 악덕 상술이 판을 치는 것이다. 홍보관 판매는 대부분 농촌이나 도시의 저소득층 밀집 지역에 몰려 있다. 이곳 노년층은 일반적으로 젊은 세대에 비해 생활이나 건강상에 불안을 안고 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런 불안을 이용하는 업자들의 기만적 상술에 넘어가기 십상이다. 또 대부분 퇴직 후 사회 제1선에서 물러나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 흐름에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홍보관의 말과 체험담을 믿고 쉽게 계약하는 경향이 있다. 노인에게 자연스럽게 닥치는 육체적·정신적 기능 저하를 악용하는 다양한 기만 상술이 홍보관 영업의 뼈대인 셈이다.
많은 노인은 선물을 받으러 갔다가 재미를 느껴서 홍보관이 문닫기 전까지는 매일 출입을 하며 오락과 소일, 그리고 물건 구매를 반복하는 일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일회성 상품 구입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구매가 나타나면 종국에는 파탄이 기다린다. 이 같은 홍보관의 노인 상대 악덕 상술에 대해서는 업계 내에서도 그 폐해를 인정하고 대책 마련을 호소한다. 서울 종로구에서 6개월째 홍보관을 운영하고 있는 한 사업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꾸라지 몇 마리가 물을 흐리듯 형사처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동료 사업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홍보관이 노인 상대 사기꾼은 아니다. 60% 정도가 문제가 있고, 나머지 40%는 비교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며 건실하게 영업하는 곳이다. 문제를 일으키는 곳은 5~15일짜리 단타방들이다. 이곳에서는 노인을 상대로 한탕 하고 튀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어서 업계의 물을 흐린다. 이런 업소는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그러나 현행법상 홍보관 방식의 영업은 엄연히 불법인데도 이에 대한 규제와 대책 마련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노인 피해자 가족이 부당한 물건의 반품이나 계약 해제를 요청하면 홍보관 사업자는 '청약 철회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하게 요구할 경우 지금까지 무상으로 주었던 생필품과 경품 등의 대금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과다한 위약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또 홍보관 업자는 대금을 제3의 전문 채권업자에게 인수하는 방법을 쓰기 때문에 피해 노인이 대금을 미납하면 채권업자가 협박하고 채권 추심을 하는 일도 다반사지만 '청약 철회 기간'이 지나면 달리 대처할 방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