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04.30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인천 2.1℃
  • 흐림수원 3.7℃
  • 청주 3.0℃
  • 대전 3.3℃
  • 대구 6.8℃
  • 전주 6.9℃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여수 8.3℃
  • 흐림제주 10.7℃
  • 흐림천안 2.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배너

한국교회, 1차원적 인간과 키치적 인간

 

A. 마르쿠제의 1차원적인 인간

 

프랑크후르트 학파 마르쿠제는 그의 저서 '1차원적인 인간'에서 인간이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에 속박되어 있고, 대중매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노예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마르쿠제는 현존의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비판하면서 현실적인 결함을 폭로했다. 마르쿠제는 마르크스를 재해석하고 자본주의와 산업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마르쿠제는 현대인들이 발달된 산업문명의 노예가 되었고, 개인들은 철두철미 물질적으로 발달된 사회에 의해 지배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대사회의 능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 무한히 거대하며, 그것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지배가 과거 어느 때보다 무한히 거대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발달된 과학기술이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이 가져다 준 편리성과 기술의 혁명에 의존하고 있지만 현대인들은 어느듯 과학과 기술의 노예가 되어 창조적 자유로운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어렵게 되었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현대인들을 1차원적 인간이라고 보고 있다. 1차원적인 인간은 물질적, 과학적,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자신이 억압되어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동차와 고급아파트, 핸드폰과 같은 문명의 이기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영혼을 발견한다. 마르쿠제는 그들이 자율성을 지킬수 없는 한, 과학문명과 제도에 의해 노예가 되어 있는 한, 무엇이 참되고 거짓인지 조차 구분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르쿠제는 물질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야만 2차원적인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의 1차원적인 인간          

 

지난 2년 동안 한국의 개신교는 1차적인 것보다 2차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다. 즉 영적인 것보다 윤리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다.  개교회의 후임자청빙의 여부가 온 세상을 뜰끓게 했다. 온 매스컴과 교수들, 학생들, 세반연 관계자들, 중대형교회목사들, 장신대 동문들이 명성교회의 세습갖고서 난리를 쳤다. 그들은 1차적인 영혼구령사업보다 2차적인 세습이라는 윤리에 목숨을 걸었다. 성서는 1차적인 것을 중시한다. 

 

한 교회의 목회승계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2차적인 문제인데 마치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만들어 갔다. 1차적인 것이 2차적인 것으로 되고, 2차적인 것이 1차적인 것으로 변했다. 교회의 본질적인 목적이자 1차적인 목적은 영혼구령사업 이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마지막까지 관심을 두 것은 세습이나 목회승계에 대한 윤리적인 관점이 아니라 땅끌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영혼구령사업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행1:7-9)


그러나 현대의 제도와 교리, 관행에 포위된 사람들은 윤리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새로운 영적 세계를 윤리적 세계로 대치하여 복음전파보다는 혈연적 승계에 더 관심을 두었다. 1차원적인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1차원적인 인간들은 제도와 도덕, 윤리에 억압되어 자유와 기본권, 신도들의 권리, 교회의 안정과 영혼구령사업에는 관심이 없고 개교회의 혈연적 승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윤리적인 문제보다 영혼구령사업을 우선 생각한다. 투기와 분쟁, 겉치레와같은 윤리적인 문제점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더 귀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1:14-18)
 

혈연이든지, 친척이든지 기득권에 상관없이 우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선 순위이다. 아들이나 사위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면 이는 축복받을 일이다. 그러나 아들이나 혈연이 무능력한데 억지로 아버지나 전임자가 밀어부치면 이는 반성서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혈연자들도 영혼구령사업에 동참해서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영적인 사업을 한다면 이는 성서적으로 축복받을 일이다. 

 

불행하게도 한국기독교가 1차원적인 제도적, 교단적, 윤리적, 관행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1차원적인 인간이 되었고, 영혼구령사업에 앞장서는 2차원적인 인간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다. 1차원적인 인간으로 머물다 보니 제도, 관행, 기득권, 혈연, 윤리적 사고와 같은 2차적인 것에 사로잡혀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서와 교회법이 말하는 1차적인 본질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본질에서 벗어난 비본질적인 2차적인 것에 머물고 있다. 1차원적인 사람들은 본질보다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1차원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2차적인 데 관심을 두면서 마치 1차적인 데 관심을 갖는 것 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도와 교리, 윤리, 관행, 상식 같은 2차적인 데 관심을 둔다. 교수들, 대형교회 목사들,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2년 동안 한국의 개신교는 불행하게도 1차적인 것보다 2차적 것에 목숨을 걸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돌도 2차적인 제도와 관행, 율법, 윤리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사람들을 택해서 2차원적인 세상에 대해서 설파하셨다. 그들이 1차원적인 인간에 머물지 말고, 하늘나라라는 2차원적인 세계를 중시하라고 설교하셨다. 

 

B. 키치적 한국기독교

 

키치는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이다.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현대 대중문화·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술사가 조중걸씨는 그의 책,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 에서 키치는, "뻔뻔스러움의 자리에 허위의식이 자리 잡은 통속 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키치는 19세기 독일에서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것으로서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허위의식에 기대어 번식했던, 순수 예술을 가장한 기만적인 통속 예술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키치는 사이비 예술, 주관성에 사로잡혀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 Arnold Houser는  "키치가 내세우는 요구들이 아무리 고상한 것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키치는 사이비 예술인 것이며, 달콤하고 싸구려 형식을 갖춘 예술이고, 위조되고 기만적인 현실 묘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키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키치는 의미를 가장하고 주관성을 띠고 있다. 즉 대상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대상을 감상하는 자기 자신에 관심한다. 따라서 키치는 순수 예술의 형식을 빌리지만, 순수 예술이 감상자를 밀어내고 스스로의 진리를 구축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저하게 감상자의 기호를 따른다. 대상에 대한 예술적 가치보다, 대상을 보고 있는 자기자신에 관심하는 허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파리 국립예술관에서 밀레의 만종이나 고호의 그림을 보면서 작품의 예술성에 감동되는 것보다, 그림을 보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감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키치는 통속예술과는 또 다르다.
 
삶의 힘든 노동에 지친 대중들에게는 순수 예술을 즐긴다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적 동물로서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여흥으로서의 예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통속 예술이다. 통속 예술에는 진리보다는 사람들에게 잠시나마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통속 예술은 스스로에게 고급예술이라거나 쾌락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장하지는 않고 삶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통속 예술은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차라리 순수하고 솔직하다.
 
키치는 고급예술을 가장하는 통속예술
 
그러나 키치는 주관성이 가미되어 고급예술을 가장하는 통속예술이다. 감상자는 키치를 통해 손쉽게 자신이 고상한 예술행위를 감상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질 수 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키치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가 아니라 거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소비하는 태도 자체를 가리키게 된다. 감상자는 연극 작품을 보면서 작품 속에 담긴 슬픔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다. 키치는 "이차적 눈물"이다.
 
커피광고는 커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아름답고 우아하게 꾸며진 분위기있는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광경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오래 전에 커피광고로 이름을 낸 연극인 윤석화는 『알고 보면 나도 부드러운 여자예요』라고 광고해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시청자들은 커피맛보다 당시 학벌파문이 일어나기 전 한창 잘 나갔을 때의 윤석화의 모습에 더 매료되었다.  
 
소비자의 관심을 상품 그 자체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능적이거나  호사스럽거나 아늑한 분위기일 것이다. 사용가치는 이렇게 잉여가치로 전락을 하고 사물의 의미는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다.
 
키치는 이처럼  원래의 본질보다는 이차적인 곳으로 방향을 전환시킨다. 본질과 실체, 대상이 사라진다. 고급예술을 추구하고자 하는 허위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사물을 지향하고 있다. 즉 대상의 객관성보다는 보는 이의 주관성에 관심한다.
 
예술작품은 작품에 대한  객관적 가치보다도 단지 자기 감상을 위한 주관적 가치로 전락한다. 아무리 심오한 깊이를 담은 예술 작품도 키치적 태도에 사로잡힌 감상자 앞에서는 그저 하나의 거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더욱 나쁜 것은, 이런 감상자들이 많을수록 그들에게 거짓 예술을 팔아먹는 키치 장사꾼들 역시 늘어난다는 것이다. 사회에는 점점 키치들이 범람하게 된다.

 

키치적 교회


그러나 한국개신교 신도들은 교회라는 원래의 공동체보다 가시적인 교회당을 더 좋아한다. 즉 진정한 교회인 1차적인 공동체에 관심을을 두어야 하는데 2차적인 교회건물에 관심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요즈음은 교회 부도 투성이 이다.  교회분쟁도 결국 가시적인 교회당 차지하기 이다.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무형의 에클레시아보다 한 평에 수백만원, 수천만원씩 하는 가시적인 교회(당)만을 교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사로 볼 때 가짜를 의미하는 키치적 신앙이다. 교회의 가치와 본질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상에 더 관심하며, 이것을 차지하는 것이 곧 교회를 지키는 것이며,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십자가 군사로 자리매김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해 한다.

 

건축후유증으로 무형의 교회가 다 파괴되어도 관심 없으면서 수십억씩 은행대출을 받아 매달 수백만원씩 이자를 내면서도 아름답게 건축한 유형의 교회를 보면서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는 것이다. 본질을 도외시 한 키치적 신앙이다. 2차적인 데 관심있는 것이다. 1차적인 것보다 2차적인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개신교도들이 1차원적인 인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1차원적인 인간은 제도와 윤리, 관행, 상식이라는 2차적인데 억압된 사람을 말한다.  

 

키치적 설교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신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대신 목사의 유머러스한 설교에 매료되어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펑펑 흘린다.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에 만족하며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있다. 목사들은 은혜나 영적인 감화를 주지도 못하면서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를 하는 것을 즐겨하고 있다. 설교를 하는 자신이 주의 종으로서 대견스러운 것이다. 키치적 목사이다.
 
키치적 신앙인들은 교회에 가면 성경말씀보다도 특정목사의 설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어쩌면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이 불렀다는 신앙인이라는데 더 감동을 한다. 그러다 보면 특정목사의 윤리문제나 교주적 리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신도는 설교자나 설교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것 보다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에 감동을 한다. 성경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성경을 들고 교회당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는 것이다. 특히 모태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내용보다 모태신앙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만족해 한다.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부합된 것보다 영락, 새문안 , 소망, 연동, 주안교회에 다니는 것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바른 의미와 해석보다, 대중의 취향이나 교회성장주의에 휩쓸려 기복과 성장에 포커스를 둔 설교를 주로 한다. 설교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특별 계시인 성경의 내용보다, 주관적 계시를 받고 설교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관심을 갖고, 대견스러워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스스로 교주화하는데 만족해 한다.   
 
키치적 목사
 
한국개신교도들은 목사를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한다. 교단헌법에도 목사는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종' 또는 '사자'이며 '하나님의 도를 맡은 청지기'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과 버금과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를 비난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교회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실제로 대형교회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는 온 데 간 데 없고 대형교회 목사만이 남는다. 그들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기 때문에 이미 카리스마틱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말에 죽고 살기까지 한다. 방송국을 때려 부수라고 하면 부수어야 한다. 그들은 감히 자신들을 십자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십자군이 된 자신의 모습에 감동을 받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시는 교주가 불륜을 하는 것은 로맨스이고, 재정을 사용하는 것은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것이고, 골프를 치는 것은 마귀 때리기 연습이고, 고급 승용차를 타는 것은 엘리아의 불병거를 타는 것으로 보인다. 부패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자체보다는 허위의식을 갖고 그들을 하나님의 대행자로 보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보는 자신이 주의 종을 잘 섬겨 복을 받는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며 자신이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키치적 신앙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금송아지로 만들었듯이,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하나님의 가시적인 모습을 목회자로 본다. 그래서 가시적인 하나님의 형상, 목회자 옆에 있는 자신들이 한 없이 즐거운 것이다. 그를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의 가방을 드는 것은 그리스도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키치는 본질보다 이차적인 면에 만족한다. 목회자에게 수천만원씩 갖다가 주는 것은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생각한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앉아야 할 자리에 목회자들이 앉아있다. 개척해서 100여명 이상만 되어도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영적인 리더 등의 명목으로 교주로서 군림하고 있다. 재정, 재산, 당회, 교회 행정과 법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맡은 소임을 다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된 것에 흐뭇해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키치적 목사이다.   
 
키치적 직분
 
교회에서 신도들이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 전도사, 구역장이 된 것에 대해 매우 흐뭇해한다. 사실 직분이라는 것은 섬기고 봉사하기 위한 것인데 섬김과 봉사는 온데 간 데 없고 장로가 된 것 자체에 대해서 만족해 한다. 그래서 장로가 되면 그날부터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직분자가 해야 할 내용보다 직분자체에 대해서 흐뭇해하며 만족하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교회에서 직분을 수여받을 때 수십만원, 수백만원의 기부금까지 내고 있다. 직분자체에 만족해 하기 때문에 직분수여를 위하여 기념비조로 헌금을 내어도 아깝지가 않은 것이다. 목회자들이 외국에서 학위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학위의 과정이나 논문의 내용보다 학위를 받는 것 자체에 만족을 한다. 한번 교수로 임직받으면 논문이나 책을 거의 쓰지않고 있다가 은퇴하는 경우가 비일바재하고, 아니면 대형교회 자리가 나오면 그리고 기득권을 옮긴다. 

 

키치적 이단감별

 

이단감별사들은 처음에는 1차적인데 관심을 갖고 순수하게 이단을 가려내어 기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고자 하였는데 최근에는 순수기독교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순수기득권을 보호하려고 하는데 있다. 즉 이들은 1차적인데 관심을 갖지않고 금품이나 기득권, 이단권력추구라는 2차적인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기독교를 보호하는 교리십자군으로서 흐뭇해하고, 가방끈도 짧으면서 이단연구가라는 자칭 학자 명칭과 남에 대한 정죄에 만족해 한다.

 

이단에 대한 심오한 연구보다는 이단대책위원이 된 것에 만족해 하고, 소명기회 없이 남을 재판하는 위치에 선 것에 흐뭇해 한다. 그러면서 온갖 언론과 고소고발건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고, 직업교리감별꾼으로서 이중적인 모습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빌라도'나 '예수 바라바'를 추구하는 2차적인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앞에는 예수인데 뒤는 빌라도나 바라바의 모습을 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삼위일체를 말하는데 뒤에서는 삼신론을 말하고, 앞에서는 성령잉태론을 말하는데 뒤에서는 마리아월경잉태론을 중시한다. 키치적 인간들이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도들에게는 교수, 교회, 설교, 목사, 직분, 이단감별을 통해서 키치가 침투되어 있다. 본질보다는 표상에 관심을 두고, 표상의 객체보다는 목회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자기주체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즉 소명에 대해 실천하는 것보다 자신이 소명을 받아 주의 종이 되고,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갖고 감동을 받는 것이다. 자신이 교리연구가라기 보다는 교리연구가라는 소리를 듣고 만족해 하는 것이다.

 

키치적 기독교
 
결국 고급예술보다 고급예술을 감상하는 자가 자신이 대견스러운 것으로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듯이, 개신교도들이 실체나 본질에 관심이 없고 성경의 내용보다 성경을 들고 교회에 가는 것을 만족해하고, 설교에 대한 결단보다 설교를 하거나 설교를 듣는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고, 예수 그리스도 보다는 보이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그림자로 생각하여 그 옆에 있는 것을 즐기고, 실제적인 공동체보다는 가시적인 교회를 보면서 좋아하고, 직분의 실행보다는 직분자체를 부여받은 것에 감동을 받고, 이단연구보다는 이단연구가라는 직위에 만족하는 키치적 신앙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몰상식교회로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과 신도들의 영적 성장보다 교인들의 숫자, 교회건물의 크기 같은 2차적인 성장에 관심을 갖게되기 때문에 통속기독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키치적 신앙
 
따라서 키치적 신앙은 사상누각으로서 질보다는 양에 관계된 것이고, 일차적 본질이나 객관적 대상보다는 이차적 요소와 주관적 감상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들이 일차적 본질에 사로잡힌 것처럼 허위의식과 기만으로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까지 위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본질적인 키치신앙이 실체나 본질보다 이차적 대상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한국개신교는 주변으로 밀려났던 것이다.
 
키치는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기만적이며 그 감상이 용이하고 무엇보다도 피상적이며 사이비예술이다. 그리고 감상자에게 아첨하고 거짓된 예술인 것은 통속예술과 같다. 그러나 키치는 자기 분수를 알아채지 못하고 고급예술 혹은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기 환상과 감상을 토대로 한 예술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자기만족적이고 자기 주관적이며 자기 환상적인 키치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수들, 학생들, 교인과 목회자들, 이대위나 이단감별사들은 키치적 교수, 키치적 교인, 키치적 목회자, 키치적 이단감별사로부터 벗어나서 가시적인 교회보다는 공동체라는 무형의 교회, 설교보다는 성경, 목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는 직분의 내용, 윤리보다는 영혼구령사업, 정치적 이단정죄보다는 순수이단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키치적 모습은 물러나고, 본질적인 신앙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이 아닐까?     

         

키치적 신앙에서 본질적 신앙으로

 

움베르트에코는 "어차피 근원이 부족하다면 표층의 흘러넘침을 축복하자. 겹겹이 둘러싼 환상의 차원을 충실히 재현하자"라고 말했다.
 
한국의 개신교는 표층의 흘러넘침보다 이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즉 키치적 신앙에서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가 키치적 신앙을 거두어 낼 때, 한국교회는 상식을 넘어 초상식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1차원적 인간이 2차원적 인간으로 될 수 있다.

 

교수들은 윤리와 관행, 상식이라는 2차적인데 관심을 두기 보다는 보다 근원, 원칙, 본질, 복음전파라는 1차적인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학생이나 신도들도 교수적. 목사적 신앙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적인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규교회사태는 당회원들이나 신도, 목사가 키치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고, 이단감별사태 역시, 감별사들이 교리감별을 위장하여 2차적인 금품에 관심을 가져 키치적인 감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외에도 목회자들이 순수신앙을 가장하여 2차적인 학연, 혈연, 지연 승계로 가는 것도 통속적인 키치승계일 것이다. 이처럼 순수예술이나 기독교는 1차적인 것보다 2차적인 데 관심을 가질 때 사이비로 전락하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개신교가 지나칠정도로 2차적인데 관심을 두어 아직까지도 1차원적인 인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볼 때이다. 1차원적인 인간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예장통합교단도 키치적 신앙에서 벗어나 보다 1차적인데 관심을 갖는 2차원적인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1차원적인 인간들은 여전히 교리와 제도, 관행과 윤리, 도덕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라는 여전히 통속의 기독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본질에 있어서 하자가 없어도 자신들과 조금 다르면 교리적 이단으로 매도하고, 선교나 영적인 것보다 윤리적 판단을 하고,  1차적인 것보다 2차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은 순수기독교가 아니라 통속의 기독교이다. 통속의 기독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르쿠제의 말에 의하면 여전히 1차원적인 인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배너

배너
배너

SNS TV

더보기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