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들어 특히 전남 일부 지역은 호우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실로 막대하다. 화재보다 수재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수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길래 그 뜨거운 불길보다 더 무섭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수재민들의 고통은 어떨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그 심정을 알고 계시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남 지역의 수재민들을 바라본다. 나도 한 때는 수재민이었으므로...
그렇다. 1999년도 여름 무렵 나는 수재민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고, 지방에서 올라와 반지하방에서 자취하는 고시생이었다. 말이 좋아 반지하방이지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여름이면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오물냄새가 코 안에서 떠나지 않았고, 방 여기 저기엔 너무나 익숙해진 곰팡이와 함께 동거를 해야만 하는 방이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두통에 시달렸고, 눈을 뜨면 이불에 곰팡이가 뭍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곤 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렵던 나에겐 밤에 눈을 붙이고 잘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젊은이로서 꿈이 있었기에 반지하방에서 오는 불편함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어느 날 저녁부터 빗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날은 피고하던 터라 일찍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붙였다. 얼마 뒤 11시 무렵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 문을 열어 보니 옆 방 누나였다. 그 누나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속살이 훤히 비치는 잠옷을 입고 입술을 부르르 떨며 나에게 말하길 자신이 자고 있던 방에 물이 들어왔고, 텔레비전, 컴퓨터 등을 윗층으로 옮겨야 하는데 무거우니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 즉시 누나 방으로 달려가 텔레비전, 컴퓨터, 옷가지 등 중요한 물건을 함께 3층으로 옮겨 주었다. 그 때였다. 아뿔싸! 내 책!!!!!
무려 2년 동안 정성스럽게 다룬 법률 서적이었고, 그 법률 서적에는 몇 달 뒤 사법시험 1차 시험을 치르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집약시켜 둔 것이었기에 그 당시 나에겐 재산목록 1호였다. 하지만 그 누나 짐을 옮기는 동안 내 방은 이미 허리까지 물이 차 올라와 있었다. 하수도에서 역류한 인분 등이 떠 있는 오물과 지상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뒤범벅이었다. 불과 몇 분 만에 멀쩡하던 내 방이 오물 바다가 된 것이다. 우선 가장 중요한 책 6권만 집어 들고 3층으로 올라갔고, 다시 내려 왔을 땐 물이 가슴까지 차 있었다. 다시 들어가다가는 감전사로 횡사할 것 같아 단념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 때가 12시 무렵이었다. 그 주변에는 대학가여서 반지하방이 많았고, 그 곳엔 학생과 신혼부부들이 많았다. 그들 모두가 짐을 윗층으로 옮긴다고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빗줄기는 더 굵어지는데 거리에 차 있던 물 위에 가전제품, 걸상, 옷 들이 둥둥 떠다녔다. 얼마 뒤 정전사태에 이르자 암흑 속에는 길거리에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와 그 와중에 들리는 애기 울음소리, 여기 저기서 도와달라는 아우성이 전부였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밤이 지나갔다. 동이 텄을 때 물이 빠져 나간 길거리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절망한 사람들이 혹시 나 건질만한 물건이 있나 헤매고 있었고, 하수관에서 역류한 인분 등은 내 방 전부를 도배해 버렸다.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당장 오늘 밤 잘 때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나와 같은 처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인 아주머니가 거실을 내주어서 그 곳에서 당분간 지내게 되었고, 옆 방 누나는 친구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몇 주가 지났지만 도저히 내 방을 다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선 인분을 걷어내고 도배할 돈 70만원이 없었고, 다시 도배를 하더라도 방에 남아 있을 하수도에서 역류한 세균과 함께 눅눅한 습기 속에서 한 여름의 열대야를 견뎌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보상금이 나온다고 했지만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그렇다고 시골 집에 전화해서 상황이 이러니 돈을 보내달라고 부탁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봐 상경할 때 반지하방에 자취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사정을 설명하면 부모님께서 흘릴 눈물을 내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공부는 해야 되는데 책은 모두 사라졌고, 돈이 없어 갈 때는 없고 그야말로 누구 하나 기댈 곳조차 없었다. 이런 내 자신의 상황이 너무 원망스럽고 한탄스러웠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져야 했는지...왜 하필이면 나에게....그 무렵 우리 동네에 일어난 수재의 원인은 단순히 자연재해가 아니라 폐수처리장에서 수문을 늦게 개방했기 때문에 피해가 확산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었다.
결국 기댈 곳은 보상금 뿐이었다. 그래서 동사무소에 전화해서 보상금이 언제 나오는지 확인을 하기로 했다. 그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그런데 그 동사무소 직원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건성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단순히 자연재해도 아닌 것 같은데 공무원은 건성이니 나는 분노에 타올랐다. 그래서 궁리하던 중에 청와대 인터넷 신문고에 글을 올리기로 마음 먹었다. 이번 자연재해가 폐수처리장의 수문을 늦게 개방한 과실로 인해 인재가 결합되었다는 점, 그로 인해 그 피해가 확산되었다는 점, 그리고 공무원의 건성 등을 자세하게 적었다. 지금 다시 그 글을 본다면 분노의 불길이 여기 저기 타오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여하튼 그로부터 1주일 뒤 담당 공무원은 나에게 직접 전화했고, 청와대 특별지시로 1주일 뒤에 보상금 150만원이 지급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보상금을 수령했고, 다시 내 방에 들어가 시험공부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그 때 내가 느낀 분노는 자연재해에서 오는 단순한 절망감이 아니라 자연재해를 대하는 국가의 소극적 시선, 내 문제가 아니면 상관 없다는 식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소수 국민에 대한 공무원의 무관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법률가가 되면 반드시 오늘을 기억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그 여름 날의 폭우의 우연은 5년 뒤의 필연으로 이어진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내가 변호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1999년 폭우 때 피해를 입은 연천군민들 100여 명이 연천댐 관계공무원의 늑장 수문개방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며 연천댐 시공사와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기회로 그 집단 소송을 내가 수행하게 된 것이다. 나 역시 그 폭우의 피해자였기에 연천군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막상 승소를 위해선 두 가지 난관이 있었다. 첫째는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점, 둘째는 군민들의 피해 액수였다. 인재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감정을 신청하였지만, 감정기관의 일부는 1,000년에 한 번 오는 폭우라는 점을 들어 자연재해라는 감정 결과를 법원에 회신하였고, 대법원 판례도 유사한 사례에서 대부분 자연재해라는 점을 들어 수재민들의 청구를 기각하던 터라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민들의 피해 액수를 입증해야 하는데 물에 떠내려간 물건들을 감정하기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재판 진행 중이던 법원에서도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나의 주장에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곤 하였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5년 전 나를 떠올렸다. 내가 느꼇던 그 분노 바로 그것이었다. 소수 국민들은 언제까지 피해자로 남아야 하며, 언제까지 억울하게만 살아야 하는가. 나 역시 수재민으로서 그 좌절감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아는 내가 포기하면 그 연천군민들은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수재민으로서 경험을 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번 소송에서 포기하지 않고 수재민의 심정으로 끝까지 밀어 붙이는 힘을 주기 위한 필연이었을 것이라 믿고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모든 방법을 강구하여 결국 두 가지 문제를 입증했고, 부족하나마 연천군민의 일부 승소로 확정 판결을 받아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만일, 5년 전에 내가 수재민의 입장에 처해보지 않았다면 훗날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그런 열정을 가질 수 있었을 까. 단언할 일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그 소송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나와 같은 열정 없이 소송을 진행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리라 본다. 맞아 봐야 아픈 걸 알고, 알아야 아는 만큼 길을 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의 웃지 못할 상황은 훗날 다가올 아름다운 결실을 위한 하나의 필연일 뿐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열린정보장애인협회, 데일리연합뉴스와 법률 고문이라는 인연을 맺었다. 이것 역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록 부족하더라도 법률 고문으로서의 내 작은 노력이 언젠가는 관계인들에게 빛나는 열매를 맺는 필연의 첫 걸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
2012년 폭우와 태풍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 모두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
▽ 남오연 변호사 프로필
2003년 제45회 사법시험 합격
2006년 사법연수원 수료(제35기)
2006년 창원지방법원 조정위원 역임
2006년 변호사 개업(서울회)
2006년 서로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2008년 종합법률사무소 AMOS 변호사
2012년 종합법률사무소 청호 대표 변호사,
삼양교통 주식회사 법률고문 변호사,
대홍전기 주식회사 법률고문 변호사,
주식회사 아름나무 법률고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