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현 회장
5세 나이에 마구 닥쳐든 외삼촌의 난동에 두팔 잃은 소녀, 그의 운명은 과연 어떠했을가! 오른쪽 팔은 손목이 없고 왼쪽 팔도 팔꿈치에서 끊겨 있어 생활 자립마저 어려운 이 슬픈 인생의 주인공이 바로 김연화양, 그러던 그가 16세 나이때 뜻밖으로 인천공항에 나타나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 ‘팔 없는 소녀’의 한국행은 벌써 2006년 1월로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가 어떻게 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고 또 한국에 온 이유는 무엇이였을가? 당시 연화양의 한국행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4.19동포 후원 장학회(이하 장학회로 약칭)의 이세현 회장은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조선조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일로 자주 연변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연변TV의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를 통해 연화양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한번도 본적 없는 생명부지의 아이였지만 그의 가슴아픈 사연을 듣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이튿날 몇몇 회원들에게 연화양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없겠는냐고 물었더니 모두 한국의 의수(義手)를 비롯해 그에게 적합한 필수품을 갖춰주는게 어떻냐고 제의하였다. 그날부터 모금을 시작하였는데 3000여만원이란 자금이 모여졌고, 연변TV와 연계하여 연화양을 한국에 초청하게 된 것이다.”
이 회장은 당시 공항에서 연화양과 펄럭이는 소매자락으로 악수하며 가슴이 뭉클하였다고 술회했다. 마중나온 회원들이 박수로 맞이하자 연화양은 “조금은 떨리기도 하고 기대도 되고 모든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한다.
결국 연화양은 7박 8일의 일정으로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보훈병원 보장구센터로부터 의수를 받았고 서울의 한 고급정형외과에서 정형수술도 받아 얼굴의 상처를 치유받기도 했다. 이에 드는 경비는 전액 장학회가 후원하였다. 연화양은 난생 처음으로 외국에 나와 봤고 비행기도 처음 타 봤다고 감회를 털었다고 한다.
독자들은 아마 두 팔이 없어 가장 기본적인 새활자립마저 하기 어려운 이 가냘픈 소녀가 그후 어떻게 살아갔으며 현재는 어떻게 되었는가고 궁금해 할 것이다. 기자가 주위 가까운 지인들과 알아본 결과에 의하면 그녀는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현재는 사회에 나와 정상인과 못지않게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과정에 그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피타는 노력과 분투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든 알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한 조선족 소녀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준 4.19동포 후원 장학회란 어떤 단체일가? 이세현 회장은 애국주의와 민족 사랑을 고취하고 불우 이웃을 도우며 동포애로써 민족의 화합을 도모하자는게 장학회의 취지라 소개하면서 사업범위를 중국에 넓혀 존선족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2002년 6월 이사회를 개최하고 본회 정관의 목적사업에 재중국 동포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본회 부설기관으로 재중국동포자녀 후원회를 설립했다. 2002년 5월 제1회 중국동포자녀 후원장학금 수여식을 진행, 철령시 조선족고급중학교의 10명 학생이 장학금을 수여받았다. 제2회부터는 수여자가 급속도록 늘어났는데 이해 연말 중국 룡정시 및 도문시 학교들의 50명 학생이 장학금을 수여받았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장학회의 수여식은 해마다 끊기지않고 진행되어 심양, 용정, 화룡, 길림, 흑룡강 등 지의 조선족학생 1000여명이 그 혜택을 입었다.
그 외에도 장학회는 ‘조선말 바로하기, 한국어 사랑’행사, ‘윤동주 추모 시랑송 및 동화구연’등 다채로운 행사를 가져 수많은 조선족학생들의 관심을 자아냈다. 상술한 내용의 행사를 가지게 된 원인데 대해 이 회장은 어느 한번 우연하게 만난 조선족학생이 조선말을 잘 못해 안타까웠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밝혔다. 장학회에서는 특히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6000위안의 장학금을 지불하고 학용품과 기념품까지도 전달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었다.
장학회는 장학활동외에도 사회에 대한 봉사를 잊지않고 잰행해왔다. 2013년도 연변의 4개 도시 한족, 조선족 시민들의 노래자랑, 경노잔치 등 행사는 참가자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히 하고 상호 우의와 소통을 촉진하는 좋은 결실을 가져왔다. 2015년부터는 다문화가정의 프로젝트인 ‘착한 아내, 착한 남편 대상’을 설치해 사회와 유관 부문의 호평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상패와 선물만 주던 것을 이듬해부터는 다문화 가정 학생들과 수상자 20여명에게 별도로 장학금과 상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와같은 행사는 다문화가정들이 한국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큰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려면 돈이 필요하다. 하다면 그 많은 돈은 어떻게 오는 것일가? 역시 관심의 초점이라 이세현 회장에게 그 자초지종을 문의하였다. 그 대답은 한마디, 1전한푼도 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어느 유관 부문의 후원을 받은게 없다했다. 100% 회원들의 개인 호주머니를 털어 모금한 것이다. 이 회장은 국가 유공자 자격으로 받는 돈 전부를 회비로 낸다고 밝혔다. 장학금도 그렇고 지어 왕복 비행기표, 숙식 모두 개인이 부담한다 했다.
장학회가 불우 이웃과 조선족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중국에 다닌지도 벌써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간 이들의 감동적인 사적들이 여러 매체 특히 연변TV에 방송되면서 중국은 물론 한국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장학금을 수여받은 학생 그리고 그 부모들로부터 감사장이 수없이 날아들었으며, 이들의 활동을 화제로 한 신문기사들도 수없이 흘러 나왔다. 이세현 회장은 사회와 민족을 위해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보훈대상을 비롯하여 대통령상, 자랑스런 한국인상, 고마운 한국인상을 수상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애대를 받고 있다.
“불우 이웃을 돕고 사회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데는 국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를 비롯하여 재중국동포자녀 후원회 모든 회원들이 한결같은 마음일 것이라 확신한다. 또 이와같은 마음가짐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에 오늘까지 견지해왔고 앞으로도 더욱 큰 성과가 있을 것이라 믿어마지 않는다.”
이세현 회장은 뜻이 같고 이상이 같은 지인들이 더욱 많이 모여 민족의 발전과 장래를 위해 기여할 것을 기대하였다.
/전춘봉 기자 qcf20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