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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한국에서의 도전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5급 장애인 최윤순씨의 한국생활 체험기

 

사실 나는 2011년도에 꿈을 안고 한국에 오기는 했으나 5급장애인이라는 불편한 몸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갈려는지 앞이 막막하기만 했다. 과연 나같은 약자가 한국에 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가? 남들처럼 현장에서 체력 노동을 한다는건 아예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이미 한국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아무일없이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낼 수는 없었다. 몇날며칠 나의 분수에 맞는 일은 무엇일가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중국에서 옷수선 일을 했으니 한국에 와서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저심이 갔다. 혼자 몸으로 단독 옷수선 가게를 해보는게 어떨가고도 생각해보았지만 중국에서 익혔던 기술이 한국에서는 긍정코 통하지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하여 어느 복장회사나 백화점의 간단한 옷수선 가게에 들어가보는게 어떨 생각해봤지만 역시 두려움이 앞섰다. 중국에 있을 때 한국 사람들이 쩍하면 쌍욕을 많이 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나도 회사에 들어갔다가 일을 잘못해 욕먹으면 어떻게 할가? 생각하기만 해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한국말로 미싱(중국 연변에서는 마선이라고 함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느 회사에 들어간다는 것도 현실적이 못되었다. 한국에 오니 이래어가 하도 많아 뭐가 뭔지 머리가 혼난스러웠다. 한국 오기전에 외래어사전이라도 들춰보며 어느정도 외래어를 장악했을걸 하는 후회도 없지않았다.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나를 놓고말하면 어쨌든 복장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으니 이것이 우세라면 우세였다.

그 외 또 하나의 우려가 있었다. 바로 비자문제였다. C-3비자로는 취직이 안된다. 나는 우선 취업비자를 얻기 위해 2평방도 안되는 고시원에 주숙하면서 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학원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아껴먹고 아껴 쓰면서 각고의 노력을 들였는데 그 노력이 헛되지않아 3개월 후에는 취업비자를 취득할 수 있었다. 비자문제를 해결하고보니 한국에 와서도 열심히 하면 뭣이든 성사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고 본격 취직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고시원 주위에 있는 한 옷수선 가게를 찾았다. 주인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그를 선생으로 모시고 미상과 옷수선 관련 명칭 및 한국에서 사용하는 미싱 특성에 대해 배우기로 하였다. 할아버지가 가르치는대로 하나하나 메모하면서 기억하고 때로 할아버지가 일손이 바쁠때면 보조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말하는 북집을 한국에서는 보빈이라 하고 미싱사와끼사라 하며 심부룸군시다라고 한다. 전혀 들어보지못한 명칭이라 기억하기 까다로왔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문화의 차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더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계몽선생이나 다름없었다. 미싱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었을뿐만아니라 한국생활에서 필요한 예절 및 상식적인 것들을 차근차근 배워주었다. 그리고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자상하고 배려심이 강해 더욱 감동을 주었다. 나는 전에 한국사람들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않았지만 할아버지와 접촉하면서 그러한 생각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인들에게서 정말로 배울점이 많다고 느껴졌다.

한동안 이 옷수선 가게을 다니면서 배우는 한편 벼룩시장 신문을 보면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마침 경기도 안양시의 한 복장회사에 가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면접보는 직원이 나와 몇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중국사람 맞아요?’하고 묻는 것이였다. 옳다고 긍정적으로 말했더니 한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는데 한국말을 제법 잘한다며 치하하는 것이였다.

이튿날부터 이 회사에 취직했는데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주로 미싱 기계자체가 틀리기 때문이였다. 속도가 빠르고 모두 자동이다. 게다가 복잡하고 기술함량이 높아 또다시 새롭게 배우지않으면 안되었다. 기계조작을 빨리 익히기 위해 남보다 일찍 출근해서는 기계성능에 대해 연구하고 튀근시간 후에도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연마했다. 두어달 지난후에는 제법 숙달공으로 인정받아 봉급도 후하게 받게 되었다. 이 회사에서만 4년을 일했는데 회사가 부도나면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옮겨다니기도 했다. 미싱숙달공이란걸 안후에는 다른 회사들에서 앞다투어 데려갈려 했는데 그후 독산동 청바지회사, 구로디지털 점포회사 등 여러 회사를 옮겨다니며 미싱 숙달공으로서의 후한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나한테는 쓰라린 추억 하나 있다. 고향은 룡정, 허나 중학은 연길 10중에서 다녔다. 공부는 꽤 잘해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1중에 붙었는데 아쉽게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나의 꿈은 그 한순간에 산산쪼각나고 말았다. 공부를 더 해 부푼 희망을 안고 대학에 갈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세상이 나에 대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허나 슬픈 마음과 아쉬움을 가슴깊이 묻어두고 금후 살아갈 인생에 대해 거듭 고민하지않을 수 없었다. 나의 건강상태를 보아 금후 힘든 일을 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 하여 중학을 졸업한후 옷수선 기술을 배워 줄곧 이 업에 종사해왔다.

오늘 나는 한국에서 새로운 꿈을 이뤄가고 있다. 회사에 출근하는 한편 3달동안을 학원에 다녀 세탁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비자로부터 F-4비자로 변경했다. 그리고 장애인 복지카드도 취득했는데 교통으로부터 전화비용에 이르기까지 많은 혜택을 받는다. 장애인 보조기도 의료보험 공단이 부여한 혜택을 받고 있으며 그 외 의료비, 전기비, 관광비용 등을 비롯해 여러 항목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한가지 더 부언하고싶은게 있다. 한국에 와 살면서 두어번인가 불이익을 당한 일이 있다. 한번은 퇴직금을 못받은일, 다른 하나는 임금체불이다. 처음에는 한국의 법을 잘 알지 못해 어쩔바를 몰랐지만 이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부처인 고용노동부와 소비자협회가 있다는걸 알고 신고했다. 생각밖으로 이튿날로 모두 해결을 보아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 한국의 법률은 잘돼있다고 생각된다. 언제어디서든 법을 잘 지키고 또 법이라는 이 무기를 활용한다면 자신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않았지만 현재는 보람을 느낀다. 한국에서의 도전은 나의 삶을 바뀌놓았다. 금후에도 나의 도전은 멈추지않을 것이며 보다 눈부신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어의심치않는다.

/전춘봉 기자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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