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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과거에는 힘들었지만 오늘은 행복합니다’


조화송, 김순희 부부

청부업자 조화송씨가 들려준 한국 건설현장 체험기   

내가 2003년도에 한국에 입국하였으니 이 낯설고 물설은 땅에서 보낸지도 어언 1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간 고독하고 어려웠던 타향살이로 힘겨운 나날을 보냈지만 현재는 180여명의 일군을 거느리는 청부업자(包工頭 혹은 오야지)로 매일 드바삐 보내고 있다. 벤츠를 몰고 전국 각지의 건설현장을 찾아다니다보면 힘겨워 녹초 될 때가 많지만 일터에서 땀 흘리는 일군들을 생각하면 잠시라도 쉴사이 없이 뛰어다니게 된다. 일군들을 먹여살리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니 나는 이들을 위해서는 그어떤 시도와 노력도 아끼지 않기때문이다.

 

2011대천댐 사건시말

중국의 조선족들이 한국에 온 목적은 한마디로 말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매일과 같이 12시간이나 되는 고된 노동속에서도, 또한 힘들고 어지럽고 위험한 일(한국에서는 3D업종이라 함)을 하면서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문화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 이국타향에서 생존의 위협을 당할때도 있으니 2011년도에 있었던 대전 대천댐사건이 바로 내가 겪었던 그 사례중의 하나였다.

사연은 이러했다. 100명의 일군들이 몇 달동안이나 피땀을 흘려 벌어놓은 돈을 받지못하게 되었는데 그 액수가 무려 18억원에 달했다. 모두들 돈을 받지못해 아우성인데 회사측에서는 경기가 좋지않다는 이유로 아예 줄 생각을 안했다. 농성도 부려보고 신고도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매일 현장 관리소장을 찾아가 도리를 따지며 속한 기일내에 체불된 임금을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관리소장의 싸인이 관건이기 때문이였다. 청부업자로 현장을 관리하는 나로서는 더욱 안타깝고 조급했다. 생명줄과 같은 그 임금을 못받을 경우 일군들의 상황이 곤난하게 된다. 모두 집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사는 사람들이니 돈이 없으면 의지할 곳도 없이 살아가기 막막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나는 부득이하게 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서, 119구조대 등 유관부문과 KBS, MBC, SBS를 비롯한 언론사를 찾아 이 임금체불 사건을 사회에 공개하고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장소는 대전 대천댐으로 하고 관리소장을 비롯해 연루된 인원들을 불러놓았는데 피해자들과 참가자 300여명이나 모였다. 이날 나는 사건의 전후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해당 인사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 안건은 일군들의 기본 권리를 침해하고 법률이 허락하지않는 것으로 반드시 조속해 해결돼야한다고 호소했다. 특히 피해자 가운데 외국인들이 대다수인걸 감안하면 이는 국가의 위상에 엄중한 침해를 주는 것으로 유관 부문은 물론 전 사회의 중시를 일으켜야 한다고 첨예하게 제기했다.

속담에 우둔한 것이 범잡는다는 말이 있다. 과단성과 용감성만 있으면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으로 통한다. 과연 이날 특단의 조치가 효험을 보아 체불된 임금을 모두 찾아 낼 수 있었으며 100여명에 달하는 인군들의 권리와 삶을 적시적으로 보장할 수 있었다. 혹자는 이 거동이 무모하고 과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피땀으로 가꾸어 놓은 열매를 보호하고 생존의 권리를 찾기 위해 어찌할 수 없는 행동이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낚시와 인연을 맺다

노무로 한국에 와 있는 중국인들에 대해 말하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무섭지않으나 일단 법적인 문제에 봉착하면 어쩔바를 몰라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골칫거리가 임금체불이다. 나는 대천댐 사건을 통해 이 점을 절실히 느꼈다. 수백명의 일군들이 돈을 받지못해 찾아와 울며불며 하소연할때면 뼈를 깎는듯한 아픔을 감수했다. 일주일내로 해결해주지않으면 죽겠다고 하고 가족에 돈을 보내지 못해 모두 굶어죽게 되었다며 통곡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볼때면 우리가 왜 이 곳에 왔는가 하는 반문을 자주 하군 했다. 허나 하도급으로 일하는 낸들 무슨 방법이 있단말인가!

대천댐 사건이 있은후에도 몇건의 임금체불 안건이 있어 무척 골머리를 앓았다. 너무 가련하고 불쌍하여 안해가 고된 노동으로 벌어놓은 돈으로 딱한 사정이 있는 일군들에게만 보조해 주었다. 매일 한숨만 쉬며 낙심해하는 이들, 그리고 안해의 호주머니에서 피땀으로 벌어놓은 돈을 끄집어 낼때마다 살점을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나 또한 삭일 수 없는 스트레스로 매일 고통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러던중 뜻하지않던 액운으로 더욱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느날 갑지가 뇌출혈이 온 것이다. 40대도 안되는 나이에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였다. 몇 달간은 아무일도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으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안해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안해는 모든 일을 젖혀놓고 나의 병시중에만 몰두 하였다. 손꼽아보니 완쾌되기까지 1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간 재미를 붙힌게 낚시였다. 집에만 붙박혀 있으면 답답하여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매일 멀지않는 낚시터에 가 시간을 보냈다. 나한테 다른 경제내원은 없고 게다가 안해마저 나 때문에 일을 못하여 그간 좀 벌어놓은 돈도 밑바닥이 들어났다. 살기가 막막했다. 안해한테 미안하고 애들한테도 미안했다. 한창 잘 나가다가 한번 꺾이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병들었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전에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을 했던 동료들이 자주 찾아와 위안을 주었다. 이들도 내가 들어눕게 되자 모두 제각기 갈라져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아예 낚시터에 찾아와 나더러 다시 자기들의 오야지로 출마해달라고 간곡해 부탁하였다. 인젠 건강도 좋아지고 경험도 있기에 다시 시작한다면 반드시 거듬되는 화황을 이룰 것이라는게 이들의 이유였다. 사실 동료들이 말을 안해도 나는 언녕 나름의 속셈이 있었다. 낚시를 하면서 전에 거리가 있었던 건설 관련 인사들과 자주 연계하면서 소통을 멈추지않았다. 그들도 나를 믿던차라 다시 건설현장 일을 시작한다면 좋은 일거리를 줄 것이라며 약속했다.

 

동산재기의 꿈을 이루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기실 나는 건설현장의 일은 신심이 있었다. 한국에 나와 초창기에는 동일건설이라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중국에 있을 때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전공과 목공일을 배운 경력이 있어서인지는 모르나 현장의 어떤 일이든 맏기면 실수 없이 잘한다는 평판을 받았다. 허나 건축과 관련해서는 왕초보다. 기술인군들이 현장에서 도면을 펴 볼때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러웠다. 그때부터 마음가운데 건축일을 잘하려면 배워야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하여 누군들 도면을 들고 올때면 가까이 가서 세심이 들여다 보기도 하고 궁금한 것들을 자주 묻군했다.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차츰 시공에 관한 지식들을 장악하면서 도면을 얼핏 보아도 어떤 것이라는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욕심은 이에 멈추지 않았다. 현장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면서 간혹 컴퓨터에 뜨는 도면들이 눈에 띄자 검퓨터도 배워야겠다는 요망이 생겼다. 그 생각을 관련 책임자한테 말했더니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는 이들의 믿음을 사기 위해 날마다 일찍 오고 늦게 퇴근하면서 보다 열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얼마 안지나 나는 현장의 작업반장(오야지라고도 함)으로 되었고 현장 사무실을 드나드는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되었다. 당연하게 컴퓨터를 배우는 일도 순순히 풀렸다. 전문 시공기술자들이 시간을 타 강의를 해주었고 컴퓨터를 배우면서 나의 수준도 한층 제고 되었다.

현재까지 건축현장의 일을 맡아 하면서 한번도 실수 한적이 없다. 또 안전사고 한번도 없었다. 이는 모두 자기 노력으로 배운 덕이라 생각한다. 나의 이름만 대면 어떤 회사든 도급일을 쉽게 내주었다.

건강이 완전 회복되자 나는 나와 함께 일했던 골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일을 다시 시작하련다는 의사를 밝혔다. 모두들 또다시 나와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다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나는 동산재기의 꿈을 이뤄 또다시 현장을 뛰게 되었다. 일거리가 많아지면서 일군이 200명 가까이 늘었는데 조선족을 비롯해 거의 모두 외국인이다. 그중 적지않는 일군들이 청부업자로 되어 전국 각지 건설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우리는 힘이 부족할때면 서로 협조하면서 함께 대한민국의 건설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크게는 인천영동대교, 영동고속도를 비롯해 전국의 크고 작은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고 그 외 대림, 세종시, 서울, 강원도, 경기도 등 지역에 수백동이나 되는 아빠트 건설에 참여했다. 현대산업회사, 대림건설, 애우건설 등 전국에 이름있는 회사들로부터 인정받아 함께 건설을 추진한다.

나의 고향은 흑룡강성 œj야산 보청현 삼합촌, 한국에 와 건설현장에서 일한지도 어언 10여년, 그간 고생도 많았지만 오늘은 행복하다. 그것은 나의 노력과 창업으로 남부럽지않는 삶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청부업자라 하면 화려한 직업은 아니지만 건설에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직업이기도 하다. 한국에 와서 내가 할 일이 있고 또 이미 많은 일을 해놓았다는데서 자호를 느낀다.

/박홍남 전춘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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