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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광양땅에 쏟은 혈육의 정 영원하여라!


서정복 전 의장

한국 광양시 후원으로 지은 촌사무실 

광야촌 마을 일각

길림성 매화구시 류하현성에서 버스에 올라 남쪽으로 한시간 남짓 달리노라면 왼편에는 넓은 들이 펼처져 있고 그 들녁 한쪽끝에 아담하게 들어앉은 마을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가 바로 광양촌마을, 1936년에 일본의 이민 정책에 의해 한국 광양인 40여명이 이곳에 집단이주하면서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6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 땅에서 고이 흘러보냈다.

19973, 당시 한국 광양시의회 서정복 의장이 김갑배라는 의원으로부터 중국에 광양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광양인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회 입장에서 고향사람들을 찾아 나설 의향을 제기, 며칠후 그의 주관으로 의회간담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결과 429일 서정복 의장, 김수성 의원, 김갑배 의원 등 3명이 멀리 바다를 건너 고향사람 찾기첫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한국 광양시와 중국 길림성류하현 광양촌사이에 가지가지 감격스러운 미담들이 수없이 엮어지게 되었다.

 

60여년만의 상봉

갖은 간나신고를 거쳐 마침내 류하현 삼원포진 광양촌을 찾은 것은 51, 비록 서로간 생면부지의 낯선 사이였지만 마을 사람들과 3명의 사절들은 친혈육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 났다. 광양촌의 사람들도 같은 고향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자기들을 찾아준 그들이 너무도 고맙고도 반가와 저마다 감격에 잠겨 있었다. 3명의 사절들은 먼지가 이는 길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뜨겁게 손잡고 인사를 나누었으며 나중에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까지 하였다.

3명의 사절들은 당지에서의 조사를 거쳐 마을의 조선족호 110호에 500여명의 인구가 있으며 광양 이민1세대는 다 돌아가고 24호와 31호 등 광양후예 21명이 농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장경제충격으로 외지에 나간 인원이 많고 집에는 노소자가 많아 자식들 공부 뒤바라지가 매우 어려운 등 상황도 알게 되었다.

‘60여년의 세월속에서도 우리의 말고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여 왔다는 사실이 정말 대견 스러웠다. 제일 놀라웠던 것은 이와 같은 시골에 우리 말로 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이였다.’

서정복 의장은 이와 같이 첫 방문소감을 털면서 옛 광양인들의 노력, 분발 정신을 높이 찬양, 동시에 중국의 민족정책의 우월함에도 탄복을 금치 못했다. 그는 또 중국의 우리 고향사람들을 찾아 돕는 것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하며 금후 힘자라는대로 광양촌을 도울 것이라는 말을 납기고 귀국길에 올랐다.

 

광양촌 동포 돕기 추지위원회 설립

34일 일정으로 광양촌을 방문한 3명의 사절은 귀국후 방문보고회 등 경로를 통해 직접 보고듣고한 사실들을 널리 알리였으며 불우이웃을 도와주자는 마음으로 광양촌을 돕자는 역설도 적지않게 하였다. 중국에 확실히 옛 광양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숱한 광양시민들의 관심을 자아냈으며 마침내는 시의회의 주관으로 광양촌 동포 돕기 추진위원회가 재빨리 구성되었다.

이어 1997610일부터 720일까지 40일 동안의 범지역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기관, 단체, 개인 등이 자원적으로 참여하여 모두 3636만원(한화, 이하 모두)이라는 거액의 자금이 모아졌고 3개월 후인 8월에 서정복 의장을 비롯한 14명 방문단이 구성되어 제2차 방문이 이루어졌다.

8일에 항공편으로 심양도선국제공항에 도착, 이번에는 광양촌 촌민들에게 줄 생활용품과 광양소학교와 류하조1중 학생들에게 줄 선물, 그외 이 두 학교에 전달할 컴퓨터 등 물건을 챙겨 가져왔는데 짐이 얼마나 많았던지 대형관광버스안을 반나마 채우다싶이 하였다.

이날 심양으로부터 버스로 10시간이나 달려 이튿날 새벽 2시 통화시에 도착, 반잠도 편히 쉬지 못하고 오전 9시에 숙소를 떠나 한시간후에 광양촌에 들어섰다. 소식을 들은 촌민들이 동구밖까지 나와 맞이하였고 아이들도 여기저기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환영을 표시했다. 마을안은 삽시에 명절의 분위기로 들끓었다. 방문기념행사는 점심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은 광양촌의 조성덕 서기네 집마당에서 베풀어졌다. 촌민 200여명, 그외 삼원포진정부책임자, 중소학교 교장 및 교사들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리춘식 촌주임이 멀리 고국에서 찾아와 보살펴주신 형제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관심을 베푼 모든 한국 광양시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고국의 뜨거운 사랑을 잊지않고 기필코 잘사는 마을을 이룩해나가겠습니다.”고 환영사를 올렸다.

기념행사에서 서정복 의장은 마을회관 건립기금으로 1000만원의 기증서를 리춘식 주임에게 건네주고 이어 갖고온 선물도 전부 전달하였다.

점심식사때 손님들과 촌민들이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 하였다. 권커니 작커니하며 술도 많이 마셨겠지만 그보다도 오가는 얘기가 더 많았다. 무정세월이 흐르고 흘러 60여년만에 다시 만난 한고향 사람들, 역사는 마침내 이들에게 재상봉의 날을 마련해 끝없는 회포와 그리움을 나누게 한 것이다.

점심식사후 방문단 일행은 200평방메터되는 마을회관을 짓기로 한 공터에 가 기공식을 가지였으며 이어 류하조1중을 찾아 586컴퓨터와 프린트기, , , 도서 등을 기증하였다. 기증식에서 학교의 리재화 교장이 서정복 의장에게 명예교장 위촉장을 수여하였다.

이날 방문단은 광양소학교에 들려서도 컴퓨터 등 선물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학교시설을 자세히 돌아보고 사생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무와 격려를 주었다.

45일의 방문일정이 끝나자 방문단일행은 마을사람들의 눈물이 글썽한 바램을 받으며 귀로에 올랐다. 이번 방문에 한국 광양시 지역담당기자로 있는 김귀진씨도 동행, 귀국후 그는 광양촌방문을 소재로 종은 어찌하여 소리를 내는가라는 산문집을 집필하여 독립운동근거지로 알려져 있는 삼원포와 한국의 옛 광양인이 일떠세운 광양촌을 세상에 알리였다.

 

광양땅에 인 방문붐

2차 방문이 있은뒤 199711월부터 19999월까지 연속 5차례나 되는 방문이 계속되었는데 방문자가 연인수로 200명도 넘었다. 교통, 숙식, 등 여건이 그닥 좋지않아 종래로 외국인의 발길이 닿지않던 광양촌에 방문자 출입이 연속부절해 제법 활기를 띈듯했다.

방문자 계층도 다양했는바 의회의원, 기자, 사회단체, 경찰서, 의사 등 모두 들어 있었다. 그들은 올때마다 가치가 엄청난 생필품, 학습기자재, 도서, 위문품, 지원금 등을 갖고와 당지 촌민들과 학교에 전달했다.

불완저한 통계에 의하면 이 몇차례의 방문에 소요된 경비가 수억원에 달했다. 여태껏 외부세상과 떨어져 조용하던 광양촌에 진짜 방문붐이 인 것이다.

19981월에는 촌주임 리춘식, 서기 조성덕, 주민대표 송춘석, 소학교 교장 김호, 중학교 교장 리재화 등 5명이 초청에 의해 한국방문기회도 가지게 되었다.

서정복 의장은 번마다 직접 나서서 광양촌을 도울 것을 호소하고 방문단을 조직하였다. 그는 1998년 말에 지방선거에 출마하지않아 시의장직을 그만두었지만 의연히 광양촌돕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온 한국이 IMF한파로 어려운 경제난을 겪고있어 모든 중국방문이 어렵게 되었지만 류하조1중과 광양촌소학교 교원들이 반년동안이나 월노임을 타지 못해 곤난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서정복 회장(이때는 광양촌 지원사업회 회장을 담임)은 전체 교원들의 한달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 16000(인민페)을 갖고 다섯번째로 광양촌을 방문, 그 돈을 전부 학교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전체 교원들을 중학교 식당에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면서 어려운 여건이지만 후대양성과 민족교육을 위해 더욱 힘내라고 격려하였다.

이번 걸음에 서정복 회장은 금후 광양촌 지원보다도 교육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일 것이며 가능하다면 의료봉사 활동도 진행 할 것이라는 낙언을 남기고 귀국하였다.

1999514, 서정복 회장은 한국 조선대학부속 광양병원의 의사들로 무어진 의료봉사단을 거느리고 오전 10시 좌우에 광양촌에 도착, 행장을 푼 즉시로 의료봉사 활동을 시작했다. 봉사단 성원들은 마을에서의 진료를 끝내느라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다. 원근의 한족들도 적지않게 진료를 받았는데 저마다 약품을 푸짐히 받아가면서 감격을 금치못했다.

오후에는 진료장소를 류하조1중에 전이, 봉대상을 주로 학생으로 정했다. 이날 진료를 받은 인원은 모두 400여명, 수요된 경비가 1500만원(한화)이였다. 조선대학부속 광양병원 하상호 원장은 이번 진료결과 촌민들 거개가 심장질환 등 퇴행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금후 가능하면 이와 같은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 갈 것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도 한국이 IMF경제위기로 극히 어려운 곤난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국경을 넘어 재차 광양땅을 찾은 것이다. 이들의 행동을 어찌 의료봉사활동에라는데만 국한 시키겠는가? 한 고향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어려움을 겪는 불우이웃을 돌봐주려는 고상한 마음가짐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와 같은 행동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베풀어가며 사는 인생을 추구

중국의 개혁개방이 날로 심입되면서 그간 광양촌의 촌민들이 하나둘 외지로 떠나고 따라서 당지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중소학교도 페교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2005년에 삼원포 조중은 류하조중과 합병하였다. 그리고 현재 광양촌엔 농사에 종사하는 조선족은 한명도 없고 조선족노인협회만 있을뿐이다. 사회적인 변동은 어찌할 수 없었지만 서정복 전의장의 동포사랑과 혈육의 정은 여전하였다. 19974월부터 2016까지 서정복 회장은 31차나 방문단을 이끌어 광양촌 및 당지 조선족 학교를 방문, 번마다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물론 그와 그리고 그 일행들이 베풀어 준 것이 물건이나 돈뿐만이 아니였다. 그들은 뜨거운 민족애와 애향심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들에게 삶의 의욕과 신심을 심어주었다.

20166월 서정복 회장은 재차 방문단을 이끌고 류하조중을 찾았다. 이는 최근에 있은 한차례 방문이였다. 교육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던 그는 이번에도 탁구드라이버, 복사기, 비디오카메라, 카메라, 가야금, 드럼 등 학생들의 교육에 필요한 자재들을 갖고와 모두 학교에 기증하였다. 그 외에도 기증한 물품으로 한복 40, 사물놀이 복장 2, 학생축구복 20벌이나 된다.

기회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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