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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인권경영, 이제 ‘착한 기업’의 문제 아냐…수출·투자·채용을 좌우하는 생존 인프라로 전환

EU 공급망 실사 규범, 미·영·독·캐나다 강제노동 규제, 국내 스튜어드십 강화까지…
한국 기업에 닥친 ‘인권 리스크 경영’의 현실

▲ 사진=데일리연합 AI생성.

▲ 사진=데일리연합 AI생성.

 

데일리연합 (SNSJTV) 박용준 기자 | 국내 기업들의 인권경영 논의가 더 이상 선언적 ESG 문구에 머물지 않고, 실제 수출·조달·투자·공급망 관리의 핵심 변수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인권경영이 주로 평판 관리나 사회공헌의 일부로 다뤄졌다면, 2026년 현재는 글로벌 거래 유지와 자금 조달 비용, 대형 고객사 납품 여부를 좌우하는 실질 리스크 관리 체계로 재편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특히 유럽연합(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 흔히 CS3D로도 지칭)과 미국·영국·독일·캐나다·호주 등의 공급망 규제 강화는 한국 기업들에 “인권을 관리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압박으로 작동하고 있다.

 

EU CS3D  2024년 7월 25일 발효됐다. 다만 26년 들어 EU의 이른바 ‘옴니버스 단순화’가 진행되면서 적용 대상과 시점이 다시 조정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CSDDD 개정 제안을 공식화했다. 이사회 발표에 따르면 CSDDD 적용 범위는 5,000명 초과 고용, 15억 유로 초과 매출 수준으로 좁혀졌다.

 

따라서 “당장 내일 모든 기업에 전면 적용”이라는 식의 해석은 부정확하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기업에 여유를 준다는 뜻은 아니다. EU의 법적 적용 시점이 일부 늦춰져도, 글로벌 완성차·전자·패션·금융 고객사들은 이미 거래선 단계에서 인권·노동 실사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핵심이다. 규제의 시행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의 선행 반응이다. 대기업과 글로벌 바이어는 법 시행을 기다리지 않는다. 현대자동차는 2025년 인권헌장에서 인권경영 실행을 위한 내부 시스템 구축, 정기적 인권 리스크 평가, 결과 공유를 위한 인권실사 정책 수립을 명시했고, 협력사 행동규범에서는 공급망 전반의 윤리·노동·인권·안전 위험 식별과 평가, 정기적 검토, 고충처리와 구제조치, 하위 협력사 관리까지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권경영은 이미 원청과 1차 협력사를 넘어 2·3차 공급망까지 침투하고 있다. 수출 대기업이 먼저 움직이고, 그 요구가 중견·중소 협력사로 내려오는 구조다.

 

글로벌 국가별 동향을 보면 이 흐름은 더욱 분명해진다. 독일은 공급망 실사법(LkSG)을 통해 2023년부터 3,000인 이상 기업, 2024년부터는 1,000인 이상 기업에 대해 공급망 내 인권 및 일정 환경 의무를 법적으로 부과하고 있다. 독일 BAFA는 이 법을 “공급망에서 인권 존중 책임을 법적으로 구속력 있게 만든 첫 규정”이라고 설명한다.

 

영국은 2015년 현대노예법 제54조를 바탕으로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매년 공급망 내 현대노예 방지 조치를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2025년 말에는 관련 가이드라인도 업데이트했다. 캐나다 역시 ‘강제노동 및 아동노동 공급망법’을 2024년부터 시행해 정부기관과 일정 기업의 연례 보고 의무를 제도화했다.

 

호주는 현대노예법에 따라 공개 등록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미국은 위구르 강제노동방지법(UFLPA)을 통해 중국 신장 지역과 연계된 강제노동 상품에 대해 사실상 수입 차단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일본은 법률보다는 지침 중심이지만 2022년 ‘책임 있는 공급망에서의 인권 존중 가이드라인’을 내놓고 기업의 인권실사를 권고하는 방식으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들 국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하나다. 인권경영을 더 이상 “이미지 관리”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국은 투명성 공시를, 독일과 EU는 실사 체계를, 미국은 통관 차단을, 캐나다와 호주는 보고 의무를, 일본은 공급망 가이드라인을 앞세워 기업의 행동 변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규제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노동착취, 차별, 아동노동, 강제노동, 안전보건 미비, 하청 남용, 이주노동자 권리 침해 같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은 더 이상 “현지 하청업체의 일탈”이 아니라 원청의 관리 실패로 간주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OECD도 책임 있는 기업행동 가이드에서 기업이 자사 운영, 공급망, 비즈니스 관계 전반에 걸쳐 위험기반 실사를 수행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의 현실은 그에 비해 절반쯤 와 있는 상태다. 제도화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지만, 시장 압력은 이미 본격화됐다. 금융위원회는 2025년 12월 스튜어드십 코드 내실화 방안을 발표했고, 2025년 말 기준 249개 기관투자자가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역시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ESG 고려 적용, 책임투자 원칙 도입, 위탁운용사 선정·모니터링에서 책임투자 요소 반영, 2023년에는 환경 및 사회 관련 중점관리사안 신설 등 책임투자 구조를 확대해 왔다. 이는 인권경영이 향후 단순 공시 항목이 아니라, 기관투자자의 대화·의결권·주주활동의 직접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다만 여기서도 냉정한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KCGS가 2025년에 국내 상장기업의 인권경영 시스템 구축 비율이 전년 대비 약 10% 증가했다고 발표했다”는 식의 수치는 현재 공개된 한국ESG기준원 보도자료에서 직접 확인되지는 않는다.

 

KCGS가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2025년 전체 ESG 평가에서 상위등급 비율이 소폭 증가했고, 하위등급 비율도 일부 늘어 양극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즉 국내 기업 전반의 인권경영이 일제히 성숙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근거는 아직 부족하다.

 

오히려 공개자료를 종합하면 일부 선도 대기업과 금융기관은 속도를 내고 있지만, 상당수 기업, 특히 공급망 하위 단계의 중견·중소기업은 제도 이해와 대응 체계가 아직 취약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국내 법제의 공백도 분명하다.

 

현재 한국 기업의 인권 관련 기본 의무는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의 사업주 의무, 근로기준법 제6조의 균등한 처우 같은 개별 노동법 체계에 흩어져 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5조는 사업주가 산업재해 예방 기준 준수와 함께 근로자의 생명, 안전, 보건을 유지·증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근로기준법 제6조는 성별, 국적, 신앙,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적 처우를 금지한다.

 

그러나 이런 조항은 사업장 내부의 최소 기준에 가깝다. 글로벌 공급망 실사 체계가 요구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넓다. 하청 구조, 해외 생산기지, 원재료 조달, 이주노동, 고충처리, 구제절차, 이해관계자 협의, 공시 체계까지 포함한 통합 시스템이 필요하다. 한국에 별도의 ‘기업인권실사법’이 아직 없는 이유로, 많은 기업들이 “무엇까지 해야 충분한가”를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대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기업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은 인권경영의 본질이 ‘문서 작성’이 아니라 ‘사업 모델의 재설계’라는 점이다. 많은 기업이 아직 인권헌장 한 장을 홈페이지에 올리고, 연차보고서에 몇 줄을 추가하는 수준을 인권경영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국제 규범은 선언이 아니라 절차를 본다. 위험 식별, 우선순위 설정, 예방 조치, 내부 교육, 고충접수, 시정조치, 피해구제, 협력사 개선, 이사회 감독, 정보 공개가 실제로 작동하는지가 핵심이다. 현대차 사례에서 보이듯 선도 기업은 이미 협력사 데이터 관리, 교육, 고충처리, 하위 공급망 관리까지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는 이 기준이 다른 산업으로도 빠르게 번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법률 한 건이 아니다. 문화 인식의 전환이 먼저다. 지금까지 국내 산업 현장에는 “성과를 내면 된다”, “납기를 맞추면 된다”, “하청 문제는 하청업체 책임”이라는 사고가 강했다. 그러나 선진국형 시장 질서는 이미 “누가 만들었는가”보다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묻고 있다.

 

노동시간, 산업안전, 차별금지, 이주노동자 숙소, 아동노동 배제, 협력사 고충처리, 지역사회 피해, 환경과 인권의 결합 문제가 모두 기업가치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인권은 도덕의 언어인 동시에, 이제는 무역과 금융의 언어가 됐다.

 

기업이 가져야 할 인식 전환도 분명하다. 첫째, 인권경영을 비용이 아니라 계약 유지 비용 절감 수단으로 봐야 한다. 둘째, ESG 담당 부서만의 과제가 아니라 구매·생산·법무·인사·감사·IR이 함께 움직이는 전사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셋째, 중소 협력사를 단순 점검 대상이 아니라 함께 개선해야 할 파트너로 봐야 한다. 넷째, 국내법만 지키면 된다는 사고에서 벗어나 거래 상대국의 공급망 기준을 선제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다섯째, 인권경영은 위기 대응용 보고서가 아니라 최고경영진과 이사회가 직접 감독하는 경영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이 전환이 없으면 한국 기업은 서류는 제출해도 실제 실사나 감사에서 반복적으로 걸릴 가능성이 높다.

 

결국 2026년 인권경영의 본질은 단순하다. 그것은 규제 대응이 아니라 시장 접근권의 문제다. EU의 법 체계가 일부 조정되고, 각국 규제 강도가 다소 달라도, 글로벌 공급망은 이미 인권 리스크를 가격과 품질만큼 중요한 거래 조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형 산업국가로 도약하려면, 인권경영을 “좋은 말”이 아니라 “좋은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법은 그 뒤를 따라가야 하고, 금융은 그것을 평가해야 하며, 기업은 그것을 공급망 전체의 운영 원리로 내재화해야 한다. 탐사적으로 들여다본 현재의 결론은 명확하다.

 

인권경영은 선택이 아니라, 한국 기업의 다음 생존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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