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심 의 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여야 대선후보가 이전투구를 하고 있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백마 탄 ‘초인’을 기다리고 있어서인가 둘 다 검투사들 같다. 경제적 양극화와 빈곤층의 증가, 정치적 갈등, 청년 실업과 좌절, 고단한 삶에 대한 피로와 무능한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리더들이다. 코로나19라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불확실성의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국민 보건을 저해하는 수준을 넘어, 경제와 정치, 교육과 문화, 국제질서 등에 있어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고 동시에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몇 개의 동기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행위의 평가에 있어 선택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선택이 가능하지 않은 상태에 놓인다면 행위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존주의는 선택을 기본원리로 삼는다. 실존은 자기 자신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J.P. Satrte)는 이것을 강조하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에서 시작한 실존은 자기의 존재 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삶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했던가?
캐럴(L. Carrol)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두 갈래 길에 도착했다. 서로 반대 방향의 길이다. 어떤 길로 갈지 고민하던 때에 고양이를 만나게 된다. 앨리스가 물었다. “어느 길로 가야 하지?” 고양이가 대답한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길 원하느냐에 달려 있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모른다면, 어떤 길로 가든 상관이 없다.” 앨리스와는 달리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래서 어떤 길로 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선택하는 길에 따라 목적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대통령을 선택할 것인가? 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취임선서를 기준으로 보자.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그리고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는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다. 헌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헌법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고 또 헌법 정신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인가도 보아야 한다. 하나의 길을 정했지만 다른 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여전하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면 나머지 길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현명하게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될 때도 있다. 의견이 명확하지 않을 때 다수의 의견에 따를 수도 있지만 다수가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다수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쉽다고 해서 그릇된 길을 선택하면 안된다. 어렵더라도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선택에는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과거의 세상과 요즘의 세상은 많이 다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인간으로서 지켜야하는 윤리와 도덕, 관습 등 인간됨이 절대적 요건이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그간의 인간적, 보편적 가치들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 같다. 정치계와 경제계는 물론 교육과 문화계, 거기에다가 코로나, 기후변화, 저출산, 부동산침체 등이 가속화시킨 탓인가 전통 사회로부터 일정한 궤도를 벗어난 무절제와 혼돈으로 어지럽다. 그야말로 대혼돈, 총체적 난국인 듯하다.
한국은 본래 동방예의지국으로 불리며 예의범절을 기반으로 한 사람의 바른 도리를 우선시하여 왔다. 우리는 윤리나 도덕, 정의와 양심을 바탕으로 가정과 이웃의 바른 관계를 이루어 왔다. 그 위에 사회와 국가가 구성되고 모두가 보편적 상식 안에서 살아가면서 발전적인 세상을 기대해 왔다. 그런데 요즘의 일들은 기존의 사고 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알 수 없는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세월이 변해도 지켜야 할 올바른 인간상은 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사회에 갈등이 심각하다. 언제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엔 필연적인 시대 인식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런대로 생활 범주 안에서 마주하면서 서로 융화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것 같다. 새로운 가치 체계로 이전돼 가는 양상이 기성세대로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은 갈등이다. 그동안 이념과 지역으로 분열되었던 갈등구도가 소득양극화로 인한 계층갈등에 이어 젠더 갈등과 세대간 갈등까지 더해지면서 갈등지수가 날로 높아만 가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이다.
고대 이스라엘 다윗왕의 반지에 새겨져 있다는 문장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에도 첨예한 갈등은 있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해결을 위한 진실의 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늘 정의롭게만 진행되어온 것은 아니다. 승자의 논리가 철저하게 반영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니던가. 부정적 인간관, 부정편향이 원래 인간의 본성이기는 하다. 최대한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좋은 정보 보다는 나쁜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점점 꿈을 잃어가고 삶에 대한 확신을 잃어간다. 아무리 잘 살고 싶다고 외쳐도 앞의 날을 헤아리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불확실한 상태에 대한 불안이 또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를 낳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한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불안은 조급한 판단과 성급한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생각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에 머리를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오히려 자신에게 시선을 돌려야 한다.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한다. 교육이 회복되어야 한다. 무너진 교육적 인간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우리의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이다. 우리의 역사적 최고의 인간상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하는 사람, 그래서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교육은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한다.
교육의 목표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키우는데 있다. 선택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그냥 바람직한 수준이면 된다. 설령 나쁜 선택이었다면 방향을 바꾸면 된다. 선택은 의지(volition, will)이며 결단이다. 또 도덕적이어야 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선택을 해야 한다. 현재의 조그마한 선택이 훗날에는 매우 특별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곧 선택을 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은 역사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역사를 만드는 힘이다. 교육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