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이성용 기자 | ’소강석 목사의 목회는 신학적으로 인정 받아’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 수여..
소강석 목사,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음은 그의 영성이 이론과 실제를 만들어 놓은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이끌어 가는 한국교회 지도자상을 보였기 때문..
개신대학원 대학교에서는, 소강석 목사의 리더쉽을 인정. 실천신학으로 한국교회 세워감에 감동해서 소강석 목사의 지성과 영성을 인정해 학위 수여를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는 “모든 영광 하나님께 드립니다.” 했다.
합동 직전총회장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가 개신대학원대학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총장:조성헌 박사)는 2월 17일 열린 2021학년도 학위수여식에서 특별히 소강석 목사 명예박사학위 수여식도 진행했다.
이날 조성헌 총장은 소강석 목사가 본교에서 학위를 받게 된 동기를 설명.
조 총장은 “소강석 목사는 본교에서 목회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그가 새에덴교회를 하면서 실천신학으로 한국교회를 섬기며, 지성과 영성이 인정돼, 미국 낙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며,
“소강석 목사의 모교인 광신대 1호 명예철학박사, 백석대 명예신학박사, 단국대 명예문학박사다” 며, 그의 신학과 목회, 한국교회 연합. 교회 기관 통합을 위해 일해 온 그의 수고와 노력, 영성을 치하했다. 이어서 조성현 총장은 “소강석 목사의 지금가지 내 놓은 다수의 논문과 수 많은 저술로 한국교회에 기여한 학자이다고 소개 했다.
소강석 목사는 조성현 총장이 소개한 대로 학자이며, 목회자이며, 한국교회 지도자이다. 그리고 그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훈장 동백장, 마틴 루터킹재단 국제평화상, 윤동주 문학상 등의 수상을 받았다. 조성현 총장은 소강석 목사에 대해 소강석 목사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공로를 인정받았다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소강석 목사는 자신에게 있는 물멧돌을 던졌다. -실천신학자였다
소강석 목사는 다윗이 어린 목동으로 출발해 이스라엘의 성군이 된 것처럼, 그는 광신대부터 시작 해, 수많은 학문을 거치며 학위를 받았다. 특히, 본교에서도 목회학석사와 신학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 낙스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소강석 목사는 그의 학문을 인정 받아서 그의 모교 광신대에서 1호 명예철학박사를, 백석대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단국대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조성현 총장은 “소강석 목사는 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105회 총회장을 역임했고,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을 역임했다”며, 그의 이력을 소개하며, 지금까지 한국교단과 교계를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날 여기에 대해
'소강석목사는 한교총 대표 회장을 하면서, 한국교회 연합을 위해 헌신 했다'.
소강석 박사는 답사를 통해 “저는 광주신학교 대학부를 고학으로 다녔습니다. 그 이후 졸업 후 개신대학원대학원 전신인 개혁신학연구원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 와서도 고학을 하며, 청운의 이상과 꿈을 펼쳤다” 며, 소강석 목사는 “예장합동과 예장 개혁 교단의 통합 때에 합동 측으로 갔고, 이후 예장합동 총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도 역임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모교를 잊을 수 없어서 20년 가까이 모교를 지원하는 일을 중단한 적이 없었습니다”면서, .......눈물을 보였다.
소강석 목사는 “이것은 제 마음속에 모교를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사실 소강석 목사는 명예박사학위를 수 번 거절하였지만, 나를 낳아준 모교이기에 학위를 받는 것이 영광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해서 받게 되었다”고 그의 답사를 통해 소강석 목사의 생각을 전했다.
소강석 목사는 그러면서 옛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제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니 제 마음이 36~37년 전 신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며, “본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주신 조성헌 총장님과 교수님들에게 감사드리고,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겠다”고 인사를 했다.
’소강석 목사의 목회는 신학적으로 인정 받았다’ 이론과 실제를 보여 주었다 .
소강석 목사는 복음주의 개혁주의 영성을 가진, 전통교회를 지켜온 보수적 목회자 - 바른신학으로 현장 목회돌봄 인정.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는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교인 수가 줄지 않고,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코로나 19와 같은 위기 속에서도, 새에덴교회가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고 성장한 이유는 소강석 목사의 위기관리 능력을 꼽았다. -소강석 목사의 신학은 실천신학으로 위기관리능력에서 인정받아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새에덴교회가 위기 가운데도 성장하게 된 이유는, 먼저 리더의 영성이 건강했고, 새에덴교회 소속 성도 모두가 함께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 후원자로, 섬김이로, 동역자로, 파트너쉽으로 기도의 후원자로 위드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지도자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온 결과였다.
새에덴교회는 창립 30주년 기념 예배 때에도, 40억을, 시각장애인에게 쌀 5천포를 시작으로, 초교파적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교회와 소년 소녀 가장 그리고 총회 유관 기관과 선교 장학금 등에 나누는 등... 선교하며, 방역하며, 정부와 협상하며 비대면 교회를 대면예배로 만들어 왔다.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는 지금부터 33년 전, 가락시장 앞, 지하교회에서 개척하여, 현재 출석 성도 5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성장하였다.
특히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방역을 잘 지키며, 모범적인 교회예배 정상화로, ‘코로나 ’가 교회 주위에 감염되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확진자 없이, 예배를 잘 드려 왔다. 사실,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동안 교회 와야 할 성도들을 집에서 비대면으로 화상 예배를 드리게 하면서 적잖은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교총 대표 회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김부겸 국무총리 및 정부 방역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대화를 통해 위드코로나 시대를, 미래를 준비해온 새에덴교회가 열었다.
새에덴교회는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교인 수가 줄지 않고, 성장한 교회가 되었다. 코로나 19와 같은 위기 속에서도, 새에덴교회가 교회가 굳건히 세워지고 성장한 이유는 소강석 목사의 위기관리 능력을 꼽았다.
여기에 대해, 독일에서 40년 이상 사신 독일 Karlsruhe(T.H)대학 환경공학부 조병문 교수는 소강석 목사의 코로나 10, 팬데믹의 위기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잘 이겨감을 보면서 소강석 목사님은 “그분, 대단하다. 합리적인 목회자다. 과학적인 사고를 하면서 위드코로나 시대를 열어가는 위기관리 능력이 있다. 최고다. 목사들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나는 소강석 목사를 통해 유럽스타일 &독일식 스타일 같아 공감했다” 며, 조병문 교수는 말했다.
“사실 한국의 잘못된 신비주의도 많찮아요. 물론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죠. 물론 기도해야죠. 그러나 새에덴교회는 방역도 잘하면서, 비대면의 시기를 지혜롭게 이기 왔고, 비대면 시기에도 소강석 목사님은 설교에서도 중세에 유럽 전염병 일어날 때, 전염병에 있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원 봉사자로 수고한 기독교인들의 수고를 이야기 할때, 정말 감동었습니다” 결국 한마디. 조 박사의 말은 새에덴교회 리더가 건강하다”였다.
소강석 목사는 행동하는 영성으로, 위기 관리 능력을 선보였다 - 실천신학자.
새에덴교회가 위기 가운데도 성장하게 된 이유는, 먼저 리더의 영성이 건강했고, 새에덴교회 소속 성도 모두가 함께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 후원자로, 섬김이로, 동역자로, 파트너쉽으로 기도의 후원자로 위드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지도자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온 결과였다.
새에덴교회는 창립 30주년 기념 예배 때에도, 40억을, 시각장애인에게 쌀 5천포를 시작으로, 초교파적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교회와 소년 소녀 가장 그리고 총회 유관 기관과 선교 장학금 등에 나누는 등...
또한 예장 합동 총회장 시, 소강석 목사는 코로나 시대에 언택트 교육 시스템 전문강사를 준비해 권역별로 진행된 교육은 코로나로 힘들어 지친 목회자들에게 목회적인 희망을 주었고, 코로나 19로 엄중한 방역을 요하는 가운데 진행된 목사 장로 전국기도회에서 개인 진단 킷트로 무장 코로나 19 기간 중 교단 행사로 사람이 모일 수 없는 현실에서도 그 수많은 목사 장로가 모인 기도회를 성공시키고, 거기에 들어간 재정 수억원을 새에덴교회가 단독으로 행사비 일체 지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참전용사 행사에서 ‘메타(meta)’와 현실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 메타버스, 인공지능 (AI), 대한민국의 첨단 ICT 기술인 메타버스(Metaverse) 3 차원 융합 영상기술을 도입한 한국교회 최초로 현장감을 더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매년 6월 호국 보훈의 달에 6.25 해외 참전용사들에 대해 개 교회가 자원해서 지원하는 일을 감당 할수 있었던 것은 소강석 목사를 돕는 새에덴교회 섬김의 사역리더들의 헌신의 결과였다.새에덴교회는 코로나 19 가운데, 교회 자체적으로 의료 전문가들을 구성해서 메디컬 처치를 세웠다. 그리고 교회가 자체적으로 4단계 방역 지침을 정부보다 먼저 세웠다. 이 일은 독일 Karlsruhe(T.H)대학 환경공학부 조병문 교수가 놀랄만한 부분이었다.
자연을 이용해 배에 앉으셔서 말씀 전하시는 예수님
소강석 목사의 말대로 ‘한국교회는 선택적 대면 사회였다. 일방적이었다.
그러나 소강석 목사는 기우려진 운동장과 같은 상황속에서 교회를 세워갔다.,
사실 소강석 목사의 말대로 ‘한국교회는 선택적 대면 사회였다. 일방적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집합규제를 종교가, 특히 기독교가 받아왔는데, 이것은 모순이다. 종교, 특히 기독교만 선택적대면사회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종교 모임 규제의 문제점을 가지고, 소강석 목사는 그 당시, 한교총 대표회장의 입장에서 김부겸 국무총리를 만나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해 달려 왔다.
소강석 목사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실천신학자였다. 신학을 목회 현장에 도입
코로나 19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일방적인 선택적 대면을 하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정치인들을 만나고, 대면 시대를 열어 온 것이다. 사실. 소강석 목사도 한교총 회장을 하면서 왜 교회가 그동안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 왜 속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동안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정부의 종교활동 제재에 대해서만 말했지 못했는데, 소강석 목사는 코로나 팬데믹과 "with Corona"를 어떻케 과학적인 방법으로 대응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논의하면서 대책을 가지고 준비하며 실행하며 위드코로나 시대속에서 선교를 끊이지 아니하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사실 소강석 목사처럼 한국교회가 하면서 단결했다면 정부는 더 빨리 문제를 해결했을 것으로 본다. 결국 소강석 목사는 정부 방침을 무작정 비판하지 않고, 어떻케 하면 성도들이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며 대처해온 결과 코로나 가운데서도 성도가 줄지 않고 정상적인 가운데 대면 예배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새에덴교회가 "with Corona"를 어떻케 과학적인 방법으로 대응했나? 사실 한국교회가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처럼, 위드 코로나를 준비해야 했다. 새에덴교회가 잘한일은 새에덴교회가 선제적 방역을, 먼저 실시할 기반을 만들어 놓고, 성도들의 건강 안전을 지키며, 한국교회가 코로나 방역에서 코로나 청정지역을 만들게 된 점이다. 정말 교회가 정치보다 먼저 교회가 사용했다는 점에서 새에덴교회가 한국교회의 자존심을 회복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잘한 일이다.
“또한, 한국교회 어느 분보다 교회예배 회복을 위해 공적 사역을 하며, 현장에서 발로 뛰는 소강석 목사의 행보는 오직 교회 오직 성도였다. 교회예배를 위해 그가 알고 있는 “정부 관계자. 여.야 정치인, 문화 체육인, 법조인, 사회 지도자, 교수,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들, 의료인, 전문인 등”의 협력을 받아 내면서 위드코로나 시대를 열어 내었다”
소강석 목사는 예장 합동 총회장을 마치고도 얼마전까지도, 한국교회 총연합 대표 회장으로서 교단을 뛰어넘어 ‘정부와 교회간 문제가 생길때, 마다, 목소리만 키우고, 인신 공격을 하는 분들처럼 하지 않고, 묵묵히 위드코로나 시대를 준비해 왔다.
예루살렘 입성하면서 호산나 환영과 함께,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며, 성전청결케하고,..
소강석 목사는 한교총 대표 회장 을 하면서 국무총리등과 대화로 대처.. 했고,
소강석 목사는 시간을 내어 정부 관계자와 정치인들과 대화했고, 협상 파트너로서, 한국교회 예배 문제를 해결해 왔다.
소강석 목사는 이름없이 빛없이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개교회의 고통과 어려움은 물론 한국교회 전체를 살리기 위해 일해 온 실천신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