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연합 (SNSJTV) 박용준기자 | 1919년 9월 2일 남대문역.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 예순다섯 살 노인이 있었다.
강우규.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기록된 이 거사의 주인공은 만주에서 한약방을 열고 매약상으로 동포를 치료하던 한의(韓醫)였다. 의료인 출신 독립운동가 가운데 최고 훈격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이는 지금까지도 그가 유일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독립운동가 강우규’였을 뿐 ‘한의사 강우규’는 아니었다. 의료인의 독립운동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등 근대의학계를 중심으로 쓰였고, 전통의학 종사자들은 서술에서 통째로 빠져 있었다.
인하대학교는 융합고고학과 정상규 박사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운동에 참여한 한의계 종사자 166명을 발굴·비정(比定)하고, 이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싸웠는지를 처음으로 통시적으로 규명한 학위논문 「1905~1945년 한의계(韓醫界) 독립운동의 특징과 성격」이 작년 12월 통과됐다고 밝혔다. 특정 직업군의 항일투쟁을 구조적 인과로 설명한 연구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100여 명 대 20여 명,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던 서사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 발굴은 일찍부터 성과가 쌓였다. 대한의사협회는 2008년 156명을 발굴해 이 가운데 67명이 정부 포상을 받았고(『의사신문』 2008년 3월 3일),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은 2016년 별도로 5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의협신문』 2016년 2월 29일). 최근 조사에서는 160명 이상이 확인됐다.
반면 한의계 독립유공자는 지금까지 30여 명에 그친다. 관련 독립운동사 연구는 2023년 이전까지 사실상 전무했고, 한의계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첫 학술대회는 2023년 8월 10일에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정 박사는 이 격차를 “실력의 차이도, 헌신의 차이도 아닌 보는 눈의 문제”라고 했다. 기존 연구가 도시의 대형 의료기관과 엘리트 의학생을 중심으로 서술되면서, 식민지 시기 인구 대다수가 살던 농촌과 지방에서 전개된 다른 차원의 항일투쟁이 시야에서 통째로 빠졌다는 것이다.
“차별받아서 싸웠다”는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다
논문이 가장 먼저 겨눈 것은 학계의 오랜 통설이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의생규칙(醫生規則)」을 공포해 한의사를 ‘의생(醫生)’이라는 한시적·보조적 신분으로 격하했다. 학력 요건은 아예 요구하지 않았고, 한의학 전문 교육기관은 해방 때까지 단 한 곳도 세우지 않았다. 기존 연구는 이 직업적·사회적 차별이 반발심을 낳았고 그것이 독립운동 참여로 이어졌다고 설명해 왔다.
정 박사는 두 가지 반례로 이 인과를 무너뜨린다.
첫째, 의생보다 규제가 훨씬 느슨했던 약종상·매약상·침의 등 다른 한의계 종사자들의 참여를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판결문에 이름이 남은 110명 가운데 약종상 36명, 매약상 29명 등 한의 계열이 69.1%를 차지해 면허 소지자인 의생(34명)보다 훨씬 많았다.
둘째, 1913년 「의생규칙」이 나오기 전인 1900년대 후반 후기의병 시기에 이미 한의계 인사들이 의진(義陣)을 일으켰다. 차별이 원인이라면 존재할 수 없는 참여다.
논문이 대신 제시한 인과는 이렇다. ① 제도적 격하와 도시 편중 의료정책 → ② 농촌의 거대한 의료공백을 한의계가 메우면서 확보한 향촌의 신뢰, 민중 네트워크, 약재 유통망 → ③ 그 자산이 그대로 무기가 된 항일 투쟁. “증명할 수 없는 ‘동기’를 버리고 증명할 수 있는 ‘구조’로 옮긴 것”이라는 게 정 박사의 설명이다.
국가가 버린 자리, 의사 1인당 3만 1,780명
논문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와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중의원 회의록을 교차 분석해 그 ‘구조’를 숫자로 제시한다. 제국의회 회의록은 역사학계에서는 활용돼 왔으나 의사학(醫史學) 분야 학술지에서는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는 1차 사료다.
1943년 조선의 의사는 2,618명. 이 가운데 30.6%가 경기도에 몰려 있었다. 경기도는 의사 1인당 담당 인구가 3,801명이었지만 충청북도는 3만 1,780명이었다. 8.4배 격차이자, 물리적으로 진료가 불가능한 수치다.
같은 해 충북의 ‘의생’은 165명으로 의사보다 5.3배 많았다. 전국으로 넓혀도 의생 3,337명이 의사 2,618명을 앞섰다. 논문은 이를 두고 “의사는 도시라는 점(點)에 고립됐고, 의생은 지방이라는 면(面) 전체에 퍼져 있었다”고 썼다.
1940년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일본 본토 0.91명, 같은 식민지인 대만 0.42명, 조선 0.13명이었다. 총독부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치 0.67명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시혜(施惠)’를 표방한 관립·도립의원의 실상도 통계로 드러난다. 1909년 대한의원 이용률은 인구 10만 명당 기준으로 일본인이 조선인의 외래 35.3배, 입원 91.4배였다. 빈민 무료 진료 환자 비율은 1910년 83.4%에서 1940년 3.75%로 떨어졌다. 논문은 이를 “피지배 민중의 생존권을 구조적으로 방기한 의료적 학살”로 규정한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일제가 도태시키려 한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의병장·장터·병참선, 세 가지 유형
제1유형 무장 투쟁·의열 활동(45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의병이다. 근대의학 출신 독립운동가 중 의병 계열은 단 한 명도 없지만 한의계에서는 17명이 확인되며, 대다수가 단순 가담자가 아니라 의병장과 간부진이었다. 고종의 밀지를 받고 관직을 던진 태의원 전의 정환직은 산남의진을 결성했다가 재판도 없이 총살됐고, 침의 서종채는 선봉장으로 전투를 지휘하면서 다친 부하들을 직접 침으로 치료했다. 형량이 확인된 의병 계열 10명 중 7명이 순국했다.
만주에서는 한의학 지식이 곧 전술이 됐다. 한국독립군 군의관 신홍균은 1933년 대전자령 전투를 앞두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부대원들에게 산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감별해 먹여 전투력을 보존했다. 독립운동가 백강 조경한의 회고록에 남은 기록이다.
제2유형 3·1운동(51명)은 도시·학생 중심의 근대의학계와 정반대였다. 강화의 의생 장윤백은 자택을 태극기 제작 아지트로, 정주의 의생 이위춘은 오산학교 학생들에게 비밀 인쇄소로 내주어 독립선언서 400매를 등사했다. 함안의 의생 엄주신은 “약봉지를 만들겠다”며 종이를 대량 구매해 선언서를 찍고 1,300여 명을 지휘해 투석전을 벌였다. 황해 신천의 의생 임도성이 받은 징역 3년은 유관순 열사가 2심에서 받은 형량과 같다.
제3유형 조직·병참 지원(70명)은 전체의 41.7%로 가장 많다. 한의계의 국내항일 참여 비율은 35.15%로 전체 독립유공자 평균(17.2%)의 두 배를 넘는다. 망명하지 않고 감시의 한복판에 남았다는 뜻이다. 동화약방을 창업한 한약종상 민강은 약방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서울 연통부로 내주었고, 매약상 한순직은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조달하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인삼과 녹용을 다루며 거액의 현금을 유통하던 이들을 일제는 사상범이 아니라 ‘중대 자금책’으로 분류했다.
미서훈의 역설, 성공한 병참일수록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166명이라는 숫자는 상한선이 아니라 하한선이다. 논문이 도달한 가장 뼈아픈 결론이 여기에 있다.
제1유형은 참여자의 76%가, 제2유형은 73.9%가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를 책임진 제3유형 국내항일 부문의 미서훈율은 59.6%에 이른다.
이유는 역설적이다. 군자금을 조달하고 비밀 서신을 전달하는 병참 임무의 성공 조건은 적발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치밀하고 헌신적이었던 사람일수록 일제의 판결문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서훈 심사 기준은 바로 그 판결문에 크게 의존한다.
판결문이 실재하는데도 서훈에서 빠진 사례도 적지 않다.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확정 판결을 받은 주인화, 치안유지법 위반 징역 2년의 강양원, 모살미수 징역 6년의 신상호, 쉰다섯의 나이에 태형 90대를 선고받은 방달홍 등이다.
또 하나의 구조적 함정도 있다. 오랜 세월 약종상·매약상으로 살아온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제도 편입을 거부해 면허를 취득하지 않았고, 그 결과 경무국 보고서와 판결문에 ‘무면허’ 또는 ‘무직’으로 기록됐다. 반일 의식 때문에 면허를 거부한 사람들이 바로 그 이유로 오늘날 직능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앱 개발자에서 하버드 교재 수정까지, 11년의 기록
정 박사의 이력은 학계에서 흔치 않다. 그는 2016년 현역 공군 장교 시절 KBS 광복절 특집에 출연해 자신이 개발·운영하던 국내 최초의 보훈문화 앱 <독립운동가>를 선보였다. 잊힌 선열의 서거일에 이용자 휴대폰으로 알림을 보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기리도록 한 앱이다. 11년째 전액 사비로 운영 중이며 누적 다운로드 50만 건을 넘겼지만 광고 하나 없는 비영리 공익 플랫폼이다.
처음 등재된 독립운동가는 160여 명이었다. 2026년 8월 31일 현재 약 520명으로 늘었다. 후손의 제보로 집안에 내려오던 유품을 확인하고 구술을 채록해 사료와 종합한 결과다. 앱에 등재되면 이용자들이 그분의 서거일에 감사 댓글을 남긴다.
기록을 모으는 일은 이내 기록을 바로잡는 일로 이어졌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행정대학원)에서 수학하던 2022년 9월, 그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1학년 필수과목 교재의 일제강점기 서술을 문제 삼았다. 식민 지배가 한국 경제성장의 토대였다는 취지의 대목은 남아 있는 반면, 강제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토지 수탈에 대한 서술은 한 문장도 없었다.
“2015년부터 이곳을 거쳐 간 7천 명의 리더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사를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문제를 처음 제기하고 성명문을 작성해 공론화한 사람이 그였다. 반박 자료를 만들어 온라인 국제청원을 올리고 하버드 한인학생회를 설득했으며, 김영현 씨 등 한인 유학생들과 함께 교내 신문사와 교수들의 지지 서명을 모아 학교 측에 제출했다. 2022년 9월 30일 JTBC 〈뉴스룸〉이 그를 단독 인터뷰해 이 사안을 처음 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주요 언론이 잇따라 다뤘고, 그해 11월에는 하버드 교내신문 『하버드 크림슨(The Harvard Crimson)』에 열 차례 넘게 고쳐 쓴 기고문을 실었다.
7년 가까이 그대로였던 서술은 2023년 개정에서 바뀌었다. “식민 지배는 일본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대목은 “끔찍한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로 고쳐졌고, 일본군 위안부와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관한 서술이 새로 들어갔으며, ‘일본해’로만 적혀 있던 지명은 동해 병기로 바뀌었다(월간 『독립기념관』 2023년 11월호).
앱이 잊힌 이름을 불러오는 일이었다면, 하버드 교재 수정은 잘못 적힌 문장을 고치는 일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다음 순서였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데서 나아가, 학문의 언어로 증명하는 단계다.
한의계와의 인연도 앱을 운영하던 그 시기에 시작됐다. 어느 날 “작은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하는 후손을 만난 것이다.
“역사를 가장 싫어했던 이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 암기가 아니라 ‘억울하게 빛을 보지 못한 영웅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니 전혀 지루하지 않더군요. 결국 모든 것은 나의 관점과 마음가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가 자료를 조사해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신청한 두 명의 한의사가 신홍균, 신광열(본명 신현표) 선생이다. 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신광열의 경우 결정적 단서는 아들의 기억 한 조각이었다. “지금도 기억나, 센롭뱌쿠나나쥬큐.” 아버지의 서대문형무소 수감번호를 일본어 발음으로 기억하던 증언에서 1679번을 찾아냈고, 신현표·신광열·신호가 동일인임을 입증해 2022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으로 이어졌다.
“연구실에서 끝나는 것을 넘어 국가의 공식 인정으로, 그리고 후손들이 오래 품어온 한을 푸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정 박사는 2020년부터 6년 4개월간 학술지(KCI 등재지) 논문 5편, 단행본 4권, 전문 월간지 기고 30편, 언론사 주간 연재 20편, 학술대회 발표 등을 통해 이 주제를 다뤄 왔다. 그동안 KBS 〈아침마당〉과 〈지식채집프로젝트 베짱이〉, SBS 〈뉴스토리〉, MBC 역사 특집, EBS 〈초대석〉 등에 출연해 발굴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알려 왔다. 최근에는 전국 한의사를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연구 성과를 처음 공개했다.
“병든 육체를 넘어 병든 역사를 고치고자”
논문은 후속 과제로 근대의학계와의 비교연구를 제시했다. 경성의전·경성제대·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왜 유독 학생운동과 임시정부 계열에 집중되는지를 같은 분석틀로 규명하면, 일제강점기의 두 의학이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였음이 드러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실제로 논문은 한의계가 서양의학을 배척하지 않았음을 저술로 입증한다. 홍종철은 『경락학총론』(1922)에 서양 해부학 지식을 반영했고, 박용남은 『가정구급방』(1928)에 인공호흡법과 지혈대 사용법을 실었으며, 조헌영은 『통속한의학원론』(1934)에서 동서의학을 비교 고찰했다. 반면 서양의학을 배운 신식 의사 가운데 절충이나 융합을 시도한 인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식민지 백성의 병든 육체를 치유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조국의 병든 역사를 고치고자 투신했던 166명의 이름은, 오늘날 전문 지식인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시대적 책무가 무엇인지를 일깨우는 교훈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논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논문 한눈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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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1905~1945년 한의계(韓醫界) 독립운동의 특징과 성격」 ·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 문학박사학위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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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인원 |
166명 — 제1유형 무장투쟁·의열활동 45명, 제2유형 3·1운동 51명, 제3유형 조직·병참 지원 7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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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1만 9,167건 전수조사, 국사편찬위원회 수형기록카드,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서, 『조선총독부통계연보』,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중의원 회의록, 후손 구술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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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통계 |
1943년 의사 1인당 인구 — 경기 3,801명 / 충북 3만 1,780명 · 1940년 인구 1,000명당 의사 — 일본 0.91명, 대만 0.42명, 조선 0.13명 · 도립의원 무료진료 비율 83.4%(1910) → 3.75%(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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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서훈현황 |
제1유형 24% · 제2유형 26% · 제3유형 국내항일 59.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