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호머 비즐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헐버트, 그는 판세가 기울어도 물러서지 않았다.
양화진 언덕에 서면 강바람을 타고 찬양 소리가 낮게 번져 온다.
호머 헐버트의 묘 앞에 기도를 시작하던 순간, 나는 이유를 다 설명하기 어려운 뜨거움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흘렀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애가 남긴 무게가 살아 있는 자의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는 감각이었다.
그는 하나의 이름으로 다 담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교육자였고, 『사민필지』를 펴낸 한글 학자였으며, 일곱 개 언어를 구사한 언어학자였다.
러일전쟁을 취재해 세계에 타전한 언론인이었고,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암살의 공포 속에 있던 고종의 침전을 권총을 품고 지키며 경호를 자청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한제국의 특사 역할을 수행하며 열강의 문을 두드렸고, 헤이그 특사 파견 과정에서도 물밑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조선의 백성 편에서 감당한 진정한 벗이었다.
한 인간이 자기 목숨에 대한 두려움마저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인지도 모른다.
원칙은 승리보다 중요하다.
헐버트는 "원칙은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는
가훈 속에서 자랐다.
이 한 문장은 그의 생애 전체를 미리 새겨 놓은 예언과도 같았다.
승리할 수 없는 판세 앞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일.
그것이야말로 그가 평생 반복한 선택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조선의 운명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냉정하게 계산하는 사람이라면 승산 없는 싸움임을 모를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헐버트는 고종의 친서를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을 배신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백악관과 국무부의 문을 수없이 두드렸지만 끝내 외면당했다.
미국과 일본이 이미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판이 끝났다고 해서 그의 싸움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그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왕을 곁에서 지켰고,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 속에서도 진실을 기록했다.
결국 일본은 그를 조선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추방은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그는 미국의 안락한 삶을 마다한 채 38년 동안 강연과 저술, 언론 기고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그에게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두려움을 뛰어넘을 만큼 지켜야 할 가치가 분명했던 것이다.
'엘리트'란 무엇인가
헐버트는 미국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그는 다트머스와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한 젊은 엘리트였다.
원했다면 미국에서 안정되고 존경받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스물세 살의 그는 낯선 조선 땅을 선택했다.
영어를 가르치러 왔지만, 먼저 우리말과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비를 들여 한글을 익혔고, 마침내 『사민필지』를 집필했다.
그것도 백성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말이다.
양반들조차 한글을 낮게 평가하던 시대에, 외국인이 먼저 그 가치를 발견하고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며, 재능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할 때 비로소 빛난다는 사실을 그는 삶으로 증명했다.
그의 제자 주시경은 훗날 한글 연구의 큰 스승이 되었다.
자유에는 반드시 값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
목숨을 건 사람이 목숨을 건 또 다른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헐버트가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자유의 값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유를 너무도 당연하게 누린다.
생각을 말할 자유, 글을 쓸 자유, 투표할 자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자유.
그러나 그 자유는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판세가 기울어도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쓰러져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국적을 초월해 이 나라를 위해 생을 바친 헐버트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내어주었기에 가능한 자유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사람들이다.
시대에 빚졌고, 역사에 빚졌으며, 인류에 빚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고백
광복 이후인 1949년, 여든여섯의 노구를 이끌고 그는 40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대한민국 정부의 국빈 초청이었다.
그리고 귀국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서울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세계에서 가장 명예로운 안식처보다 한국의 흙을 선택한 이 한마디는 그의 삶 전체를 압축한 고백이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었고, 일본이 빼앗아 간 고종 황제의 재산을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은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묘 앞에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위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위대한 삶 앞에서 오늘의 나를, 오늘의 우리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적은 미국인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한국인이었다.
그는 칼 대신 펜을 들었고, 권력 대신 양심을 선택했으며, 두려움보다 정의를 앞세운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양화진에 잠든 한 이방인은 백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는 자유의 값을 알고 있는가."
"그대는 시대와 인류 앞에 진 빚을 갚으며 살고 있는가."
"두려움을 넘어설 만큼 확신하는 가치가 있는가."
"그 가치를 위해 지금 무엇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뜨겁게 내리쬐는 양화진 언덕에서 만난 헐버트 선교사의 삶은 내 마음을 오래 붙들어 놓았다.
나는 한동안 그의 묘 앞을 떠나지 못했다.
함께한 동행자들과 그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며, 오랫동안 그 정신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죽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국을 위해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 삶은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1880년대 이후 조선을 찾아온 외국인 선교사와 교육자, 의료인, 독립운동 지원자 등 400여 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들은 선교사 외에도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땅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만들었으며, 한글 보급과 교육 발전에 힘썼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인의 독립을 위해 세계에 진실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 SNS기자연합회장 주광 김용두
출처 : KBS 역사스페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