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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보통말 최고 표준 지방은 베이징이 아니라 한 현급도시

  • 등록 2016.10.31 20: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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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말의 고향’ 석각   


외국 유학생들이 롼핑현의 스쥔융(石俊永) 교사를 따라 한어를 학습 

국가어위(国家语委)가 롼핑을 방문하고 샘플어음을 채집하는 장면    

베이징가 산 하나를 사이둔 허베이성 청더시 롼핑현(河北省承德市滦平县)이 독특한 역사적 연분으로 중국 한어 표준어 즉 보통말 언어 채집지의 하나로서 천연적인 ‘보통말 체험구’ 영광을 가지고 있다.

롼핑의 말은 발음의 정확도가 분명하고 발음이 똑똑하고 부드럽고 ‘얼화(儿化)’ 접미사, 글자생략, 꼬리음 등 습관이 없어 학습과 보급에 편리하다. 

1955년 10월 ‘전국 문자개혁 회의’와 ‘현대중국어 규범문제 학술회의’가 한민족(汉民族) 공동언어를 정식으로 ‘보통말’로 정했다.

1955년 10월 26일 인민일보는 ‘한자개혁, 보통말 보급을 추진하며 한어(중국어) 규범화 실현을 위해 노력하자’는 제목의 사설은 “이 한민족 공동어는 북방말을 기초 방언으로 하고 베이징어음을 표준음으로 하는 보통말이다.”고 선포했다.

1956년 초반 국무원은 ‘보통말 보급에 관한 지시’를 발포했다.  

600여년 동안에 표준음 형성 

200여년의 역사 단층이 롼핑의 원래 방언을‘세척’했다. 만청기민(满清旗民)들이 롼핑에 농경지를 일구고 촌락을 설치했다. 

‘보통말은 베이징 어음을 기초음으로 하고 북방말을 기초 방언으로 하며 대표적인 현대 백화문 저서를 문법 규범으로 한다.”이것이 보통말의 표준 정의이다.

바이두(百度)로 ‘보통말’을 검색하면 이런 조목이 있다. ‘2014년 9월 21일 교육부, 국가언어문자 공작위원회가 허베이성 정부와 공동으로 거행한 전국 보통말 선전주일 중점 활동을 허베이성 롼핑현(河北省滦平县)에서 진행됐다.’

롼핑과 보통말의 관계는 600여년전의 명조(明朝)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명조 초반 수십년간 몽골 정권과의 전쟁을 거처 중원지구 인구가 급감했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온정된지구로부터의 이민이 명조통치자들의 정권공고를 위한 최우선 선택으로 됐다.

산간지역위치로 전란 영향이 비교적 적으며 인구가 온정된 허베이 북부 산구가 인구의 내지 이전의 중요한 기지로 됐다. 롼핑에는 소흥주(小兴州)라는 곳이 있는데 이 지구가 고북구(古北口)밖 서민들이 명조 초반 내지에 집중적으로 이전하는 출발지로 됐다. (1403年-1424年)

영락연간(永乐年间,1403~1424년) 명성조 주체(明成祖朱棣)가 중국에 대해 영향이 심원한 결책을 내렸다. 즉 베이징에 수도를 옮기는 것이다.

역량을 집중하여 베이징 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주체는 고북구 밖 주민들과 군인을 모두 장성이내로 철수하게 하고 장성을 수비하게 했으며 장성밖 넓은 범위에 군사 격리구를 형성했다.

실제상 무인구로서 허가가 없는 황무지 개간을 금지했는데 롼핑 즉 란평이 바로 이 무인구의 최남단에 위치했다. 이러한 상황이 청조초반 재차 베이징 주변에서 란평으로 이민을 하면서 개변됐다. 

“명조 이전 란평의 방언 상황에 대해 현재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명조때 란평의 200여년 역사 단층은 마치 자기테이프를 소자한 것처럼 원래 방언을 ‘씻어버려’ 란평이 녹음 대기중의 공백 테이프로 되고 말았다.”고 왕궈핑(王国平)롼핑현 정협 부주석이 말했다.

청조건립에 의해 란평이 장성 변방의 포기된 토지로부터 다민족이 융합하는 복도로 됐다. 왕궈핑의 소개에 따르면 청조 순치황제(清朝顺治帝)가 이곳에 행궁과 역참을 설립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주둔하게 했다.

후에 강희황제(康熙帝)가 청더(承德)에 피서산장(避暑山庄)을 건설하고 란평이 청더(승덕)과 베이징(북경)을 내왕하는 중요한 채널로 됐다.

강희, 건륭(乾隆), 가경(嘉庆), 함풍(咸丰)등 4명 황제가 이 구역을 230여차 왕복 및 경과했다.

현재 이 곳에는 아직도 청조 어로유적지(御路遗址) 5개, 행궁 유적지가 8곳이나 있다. 

청조 전반기 매우 긴 시간동안 란평은 황실내무부가 직접 관리했으며 건륭 43년이 되어서야 카라하 둔청(喀喇河屯厅)을 란평현(滦平县)으로 고쳤는데 현 명칭은 ‘란하에 우환이 없고 백성들이 평안을 얻노라(滦河无患,民得平安)’는 의미를 채용한 것이다.

청조 순치황제가 토지구획령을 실시하게 되자 베이징 주변에서 만한 두 민족간 토지 모순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강희황제 시기에 이르러 모순 완화와 인간과 초지간 긴장세를 해결하기 위해 청 정부는 만족 8기 소속의 만주족 주민 즉 기인(旗人)들이 고북구 밖에 나가 임자가 없는 황무지개간을 격려했다.

황실 내무부 직접관리를 하는 황장(皇庄, 황실산장), 왕부(王府)가 직관하는 왕장(王庄)과 8기 각급 장병들의 기장(旗庄)등이 분분이 ‘고북구 밖 장전(口外庄田)’을 창설했다.

‘민국 파일(民国档案)’기록에 따르면 청조 말기때까지 란평 경내에는 황장 24개, 왕장과 기장이 130여개가 창설되어 당시 란평 경내 주체 촌락을 형성했는데 그 중 진거우툰(金沟屯, 금구둔)이 바로 기장의 하나였다.

진거우툰의 79세 노인 저우징밍(周景明)은 “진거우툰은 청조 강희시기 쟈오(焦), 뉴(牛), 아오(敖), 바이(白) 등 네개 성씨 기인(旗人)들이 고북구 안쪽 베이징 미윈(北京密云)에서 이전하여 설립한 것이다. 심지어 이 진거우툰 이름도 미윈 그쪽에서 복사한 것이다.”고 말했다.

“당시 이곳에 산장 즉 촌락을 창설한 것은 이곳의 물과 토양이 좋은 점을 발견한데 있었다.”

저우징밍은 “촌락 남쪽 500여m 되는 곳이 바로 롼허(滦河)이며 진거우툰이 위치한 지방은 비옥한 하곡 분지이다. 그러나 란평은 전체적으로 ‘산 여덟개 물 하나에 밭 한 푼(八山一水一分田)’라는 지역으로서 이전에 이곳은 외계와의 교통이 매우 불편하고 인구 유동이 되지 않았다.

현재 촌락의 네개 성씨가 여전히 이곳의 주요 성씨이다. 일부 외지성씨가 이전해 들어와도 말씨가 신속하게 동화했다.”고 말했다. 

‘고북구 밖에 산장 건설(口外建庄)’하는 과정이 마침 베이징 관화 보급과 동시에 진행됐다. 이 과정도 근본과 원인 탐구가 필요하다.

일찍 명조시기 관화 즉 공용어는 난징(南京) 즉 남경 관화로서 금릉(金陵)말을 표준 어음으로 하고 ‘홍무정운(洪武正韵)’을 규범으로 설정했다.

영락(永乐)연간에 수도를 베이징에 이전하면서 남경말이 또 당시 베이징 언어의 기초로 됐다.

만청인이 베이징에 진입한후 조정은 한문화 특히 언어 문화 학습을 적극 추진했다.

만족인이 배우고 구사한 언어는 베이징말로서 후에 점차 청조가 추진한 새로운 베이징 관화로 형성됐다. 이 시기가 마침 만청 만주족 기민(旗民)들이 란평에서 농경지 개간과 산장 창설의 전성시기였다. 

산장의 농경지와 수도간의 내왕이 밀접하면서 당시 베이징 관화의 영향이 비교적 컸다. 란평은 물론 공백 테이프로서 대량의 다양한 이민들이 강세 방언이 없고 통용 언어로 청조가 추진 보급한 베이징 관화를 사용했다고 왕궈핑이 말했다.

그러므로 청조시기 란평이 바로 베이징 관화 보급의 선행구였던 것이다.

“이 기초에서 형성된 란평말이 베이징 관화의 영향을 깊이 받고 변화중 자기의 특징을 구비했다. 예를 들면 직접적이며 뚜렷하고 명확하다.

이것이 바로 추진 보급의 표준에 부합된 것이다.”라고 그가 해석했다.

청조 말기부터 민국, 그리고 신문화 운동을 거처 영향이 광범한 베이징 관화(官话)가 최종적으로 보통말의 전신으로 됐다. 


与北京一山之隔的河北省承德市滦平县,因为独特的历史渊源,成为普通话语音采集地之一, 天然的“普通话体验区”。

“普通话之乡”石刻

滦平话音准分明,字正腔圆,没有儿化、省字、尾音等习惯,易于学习和推广。滦平成为普通话语音采集地之一

1955年10月,“全国文字改革会议”和“现代汉语规范问题学术会议”召开,将汉民族共同语的正式名称定为“普通话”。

翻开1955年10月26日的人民日报,一篇题为《为促进汉字改革、推广普通话、实现汉语规范化而努力》的社论明确宣告:“这种汉民族共同语,就是以北方话为基础方言、以北京语音为标准音的普通话。”1956年初,国务院发布《关于推广普通话的指示》。

600多年形成标准音

200多年的历史断层,“洗”掉了滦平原先的方言;满清旗民在滦平开田建庄,又让滦平成为北京官话的推广区

“普通话以北京语音为基础音,以北方话为基础方言,以典范的现代白话文著作为语法规范。”这是普通话的标准定义。

百度一下“普通话”,其中专门列了一条——2014年9月21日由教育部、国家语言文字工作委员会与河北省政府共同举办的全国推广普通话宣传周重点活动在河北省滦平县举行。

为什么是滦平“60多年前发现这个‘地儿’,600多年前形成这个‘味儿’。”滦平县县长崔瑞祥的儿化音引来众笑。

滦平与普通话的故事,要从600多年前的明朝说起。

明朝初年,经过数十年与蒙古政权的征伐拉锯,中原地区人口锐减。从人口相对稳定的地区移民,成为明朝统治者巩固政权的首要选择。

地处山区、受战乱影响相对较小、人口稳定的河北北部山区成为人口内迁的重要基地。滦平有个小兴州,是古北口外百姓在明初集中内迁的出发地。近年来,经常有河北保定以及山东、河南等地的人来这里寻根问祖。

永乐年间,明成祖朱棣作出了一个对中国影响深远的决策:迁都北京。为集中力量加强对北京城的防守,朱棣下令将古北口外的居民和军队全部撤回长城以内,固守长城,在长城外很大范围形成军事隔离区,实际上也是一片无人区,未经允许,严禁垦殖,而滦平就处在这个无人区的最南边。这样的情况,一直到清初再次从北京周边向滦平移民开荒才得以改变。

“滦平明代以前的方言究竟是怎样的,现在已无从考证。明代滦平200多年的历史断层,像磁带消磁一样,‘洗’掉了原来的方言,滦平成了一盘等待录音的空白磁带。”滦平县政协副主席王国平说。

清朝建立,滦平就从长城边塞弃地成为多民族融合的走廊。王国平介绍,清朝顺治帝曾在这里建行宫、驿站,派兵驻守。后康熙帝在承德兴建避暑山庄,滦平更成为往来承德与北京的重要通道。康熙、乾隆、嘉庆、咸丰4位皇帝往返途经此区域230余次。现在境内还有清代御路遗址5条、行宫遗址8处。

在清朝前期,很长时间里,滦平都是由皇家内务府直管,直到乾隆四十三年,才改喀喇河屯厅为滦平县,县名取“滦河无患,民得平安”之意。

清顺治朝实行圈地令,北京周边满汉之间的土地矛盾越来越激烈。到康熙朝,为了缓和矛盾,解决人地紧张,清政府开始鼓励旗人到古北口外开发无主荒地。

包括皇家内务府直管的皇庄、王府直管的王庄和八旗各级官兵所有的旗庄,纷纷建立“口外庄田”。根据《民国档案》的记载,直到清末,滦平境内共建有皇庄24个,王庄、旗庄130多个,形成了当时滦平境内的主体村落,金沟屯就是旗庄之一。

金沟屯79岁的老人周景明介绍:“金沟屯是清朝康熙时候,由焦、牛、敖、白四姓旗人从古北口内北京密云迁过来建立的。连这个金沟屯的名字也是从密云那边复制过来的。”

“当时在这里建庄,就是看中这里的水土好”,周景明说,“村子南面500多米就是滦河,金沟屯所在的地方是一片肥沃的河谷盆地。但整个滦平有‘八山一水一分田’之说,这里以前与外界的交通很不方便,人口流动不大,现在村子里的四姓还是村里的大姓。即便迁进一些外姓,口音也很快同化了”。

“口外建庄”的过程,恰好与北京官话的普及同步。这一过程也需要追本溯源。早在明朝,官方语言为南京官话,以金陵雅言为标准音,以《洪武正韵》为规范。永乐年间迁都北京,随之而来的南京话又成为当时北京语音的基础。满清入主北京以后,朝廷积极学习汉文化特别是语言文化。满族人学说的北京话,逐步成为清代推广的新的北京官话。这个时期,恰好是满清旗民在滦平开田建庄的高峰时期。

王国平认为,庄田与京城交往密切,受当时北京官话影响较大。滦平既然像是空白磁带,大量来源多样的移民没有强势方言,通用的就是清朝推广的北京官话,可以说在清朝时滦平就是北京官话推广的先行区。

他解释:“在此基础上形成的滦平话,受北京官话影响很深,演变中也具备了自己的特点,比如直接、清晰、明确。也许这些恰好符合推广的标准吧。”

从清末到民国,再经过新文化运动,影响广泛的北京官话最终成为普通话的前身。

国家语委来滦平采集样音

在滦平,最常见的一句标语:“讲标准普通话,做诚信滦平人”。在全国,目前有70%以上的人口具备普通话应用能力。“普通话之乡”的名头带给滦平的,除了自豪,还有强烈的标准意识。

/新华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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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연합 온라인뉴스팀 (김준호) 길림신문 기자 hidai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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