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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생생한 튀르키예 이야기] 신들의 도시, 페르가몬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원소명 기자 | [생생한 튀르키예 이야기] 신들의 도시, 페르가몬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

아크로폴리스 360도 보러가기

 

1. 페르가몬의 위치

 

페르가몬(Pergamon)의 현재 지명은 ‘베르가마’(Bergama)이다. 아나톨리아를 점령한 투르크인들이 예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페르가몬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 에게해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에게해가 있고,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 고원지대가 있으며, 북쪽으로는 차나칼레와 트로이 유적지가 있다. 남쪽으로는 아래 지도와 같이 사데 유적지, 파묵칼레, 라오디게아 유적지가 있다.

 

 

2. 페르가몬의 역사

 

우리에게 ‘페라가모’ 혹은 ‘버가모'로 익숙한 페르가몬(Pergamon)은 아주 오래된 고대도시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인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그 기원은 트로이 전쟁이 있던 BC 13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그리스 미케네 왕국과 트로이의 전쟁은 10년간 지속되었고, 나중에 그리스 군사들의 '트로이 목마' 전술로 최후 승리를 거두게 된다(트로이 유적도 페르가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Akilleus)와의 대결에서 운명을 달리했지만, 그는 위대한 트로이 왕국의 왕자이자 전사였다. 그러데 이 전쟁이 끝나고 그리스 군은 헥토르의 부인인 안드로마케(Andromache)를 전리품으로 끌고 가, 전사한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Neoptolemos)와 결혼시킨다.

이 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이 태어나게 되는데, 그 중 한 명 이름이 페르가모스(Pergamos)라는, '페르가몬'(Pergamon)을 건설한 사람이다.

 

오늘날 베르가마(Bergama)라 불리는 페르가몬은, 로마 제국 당시 아시아 주(州)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 도시에 가자마자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크로폴리스(Acropolis)인데, 390m 높이의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졌다.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중에 요절하면서, 그의 제국은 사분오열되며 디아도키(Diadochi)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의 수하 장군이던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페르가몬이 천연 요새임을 깨닫고 그 꼭대기에 성을 쌓는 등 이곳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리시마쿠스는 BC 281년, 코로페다움 전투에서 수하인 필레타리우스(Philetarius)의 배신으로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고, 이후 필레타리우스에 의해 페르가몬 왕국이 탄생했다.

 

페르가몬은 아나톨리아 지역이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되기 전에는 터키 아나톨리아 서부 중 상당 부분을 관할했던 왕국이었다.

이렇게 발흥한 페르가몬은 유메네스 1세, 유메네스 2세, 앗탈로스 2세를 거쳐, BC 133년 왕국의 마지막 왕인 앗탈로스 3세가 죽고 로마에 무혈 양도하며, 150년이라는 짧지만 큰 족적을 후대에 남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다.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거대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3. 페르가몬 왕국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1) 페르가몬 도서관과 세계 최초의 양피지 책 발명

 

페르가몬은 세계 최초로 '양피지'를 발명한 도시로 유명했다. 양가죽으로 만든 종이를 일컫는 '양피지'를 헬라어로 '페르가멘트'(Pergament), 라틴어로는 '페르가멘툼'(Pergamentum), 영어로는 '파르츠먼트'(Parchment)라고 하는데, 모두 페르가몬(Pergamon)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성경은 이를 '가죽 종이'라 하였는데, 현재 유명 가죽 브랜드 중 '페라가모'라는 것 역시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고대 도서관 중 가장 유명한 3곳이 있는데, 제일 규모가 컸던 곳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것으로 50만 권의 장서를 자랑했다. 그 다음이 페르가몬 도서관으로 당시 20만 권, 마지막이 에베소 셀수스 도서관으로 2만권 정도 장서를 보유했었다.

 

그런데 BC 250년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페르가몬 도서관 사이에 '정보 전쟁'이 벌어진다. 당시는 이집트를 마케도니아 출신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가 '파라오'(Pharaoh)가 되어 통치하던 시기였고, 알렉산더 대왕의 충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더의 뜻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를 세계에서 가장 크고 뛰어난 문명 도시이자 학문과 지식의 도시로 만들려는 욕심이 있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지었다. BC 250년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가 알렉산드리아의 전성기인데, 도서관에도 가장 많은 장서를 했던 시기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복원도]

 

그런데 이와 동시에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수하 장수였던 리시마쿠스가 세운 왕국인 '페르가몬'에서도, 유메네스 2세와 그 뒤를 이은 앗탈로스 2세도 정치보다 학문 연구에 치중해서 '페르가몬 도서관'을 만들어서 20만 권 정도나 되는 많은 책을 만들거나 모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페르가몬은 이집트에서 '파피루스'(Papyrus, 종이를 만들 때 사용하는 갈대)를 수입해서 책을 만들었었는데, 점점 몸집을 키워오는 페르가몬 도서관에 위기감을 느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페르가몬에 파피루스 수출을 전면 중단시켰다.

페르가몬의 유메네스 2세는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만 자라는 파피루스를 대체할 수 있는 재료를 개발하라고 신하들에게 지시, 얼마 후 양 가죽이나 송아지 가죽을 가공해 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피지'를 개발한다.

 

게다가 유메네스 2세는 획기적 발명을 하게 된다. 그동안 파피루스로 만드는 책은 휴지처럼 '두루마리 형태'였는데, 유메네스 2세는 옆에 구멍을 뚫어 꿰어 지금처럼 '옆으로 넘기는' 책을 최초로 개발했던 것이다.

덕분에 책의 내용을 찾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현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이것은 마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데이터 신호 역사가 넘어가는 사건에 준하는 것이다. 현대의 디지털 혁명에 있어 큰 전환점이 있게 한 주인공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개발했던 것처럼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다만 단점은 양피지로 만든 책은 비싸다는 것인데, 100페이지짜리 책을 만드는데 양 10마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터키에서 양 한 마리가 30만원 정도 하니, 양피지로 100페이지 책 한 권 만드는 데 3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 것이다.

BC 48년에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이던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 패한 뒤에 이집트로 도망했고, 그 뒤 카이사르와 그가 지휘하던 로마군이 이집트에 입성했는데, 카이사르가 당도하기 전 이미 폼페이우스는 그 당시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명으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는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헤게모니를 놓고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다투던 시기였는데, 클레오파트라가 정치적 목적으로 카이사르를 유혹해 자기편으로 만든 후,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이집트의 유일한 파라오가 되었다.

 

바로 카이사르의 로마 군대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이집트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중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책을 사랑했고 학문 연구에 열의를 보였던 클레오파트라의 상심이 컸다고 전한다.

후에 카이사르가 원로원과 브루투스의 계략에 말려 암살당한 후, 로마의 상황은 카이사르의 부하 장수였던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 간의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정치적 목적으로 결탁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두 사람이 정말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있던 많은 책을 소실당하고 상심해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페르가몬 도서관에 있던 20만 권의 책을 전부 빼내 커다란 배에 싣고 가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2) 세계 최초의 병원과 의사 히포크라테스

 

버가모는 의료도시로 유명했는데, 당시 헬라의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온(Asclepion)의 신전이 이곳에 있어 병원으로 활용되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활동했다. 아스클레피온은 신전이자 의학교였으며, 병원이기도 했다.

그리스의 에피다우루스 및 코스섬 의료기관과 유사한 형태의 이 아스클레피온은, 역사가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BC 4세기경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이 시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 기관이었다.

 

치료의 신 아스클레피우스의 이름을 붙인 이 병원은 현대 병원이 갖추고 있는 대부분의 것을 갖추고 있었다. 약물치료 시설 뿐 아니라 환자들의 정신 건강을 위한 연극 공연을 했던 원형극장, 심리적으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는 터널 등이 있었고, 진흙 목욕과 마사지 그리고 도서관에서의 독서도 하고, 건강을 되찾게 해 준다는 샘물 등도 만들어 전인 치료에 사용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당시의 의학 수준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아스클레피온의 유명한 의사는 바로 갈렌(Gallen)이었다. 그는 서머나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당대 왕의 주치의를 맡을 정도로 훌륭한 외과의사였고, 특히 해부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전한다. 그의 연구는 19세기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그 공적이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아스클레피온의 입구 기둥에는 뱀이 새겨져 있다. 아스클레피우스를 상징하는 동물이 바로 뱀인데, 이는 옛부터 치료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의학교와 의사협회 등 의학과 관련한 단체 마크에 뱀의 형상을 사용하고 있다.

 

[붉은 저택(City Hall)]

 

(3) 붉은 저택(Red Hall) - 버가모교회의 새로운 이름

 

버가모교회는 AD 2세기 초반 하드리안 황제 때 이집트의 신인 '세라피스 신전‘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붉은 저택’(Red Hall)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내부 길이 60m, 폭 26m, 높이 20m인 웅장한 구조의 건축물이었다.

그렇다면 '세라피스'는 어떤 신일까? 이집트에서는 태고 적부터 아피스를 숭배했었는데, 이는 고대 이집트의 황소 신을 말한다. 이집트에서는 많은 동물들이 신으로 숭배됐는데, 그 중 아피스는 오시리스와 결합하여 세라피스라고 불렸다.

이 신전의 가장 중요 부분은 3면이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색적인 것은 이 기둥이 당시에 흔했던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아니라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점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강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이 신전 밑에는 대각선으로 셀리누스 강이 흐르고 있는데,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AD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된 후 바닥을 높여 페르가몬 시민들을 위한 기독교 교회로 사용했다. 비잔틴제국이 쇠퇴하자 13세기 이후 이 역시 폐허가 되고 말았다.

 

[붉은 저택을 지키는 수호신]

 

데일리연합(월간, 한국뉴스신문) 원소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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